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이 부왕의 3년상을 마친 이후인 415년 건립했으며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호우)도 이를 기념한 물품이라는 견해가 제시됐다. 비 건립 시기를 414년으로 보는 학계의 오랜 통설을 부인하고 교과서가 바뀔 수도 있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전 한국고대사학회장)는 최근 한국목간학회에 발표한 ‘광개토왕비와 장수왕’ 논문에서 광개토대왕비를 건립자인 장수왕의 시점에서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주 교수는 특히 “그동안 광개토대왕비의 건립 시점을 무조건 414년으로 단정하고 이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왔다”며 “그러나 전후 맥락에 닿게 (비석의) 문장을 엄밀히 음미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곧바로 드러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415년에 제작된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의 명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건립 시기에 대한 이견은 비석 내 특정 문장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학계는 ‘갑인년(414년) 9월 29일에 (시신을)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라고 해석하는 반면에 주 교수는 이 문장 뒷부분의 어시입비(於是立碑)를 끊어 읽어 “갑인년 9월 29일 산릉으로 시신을 이장했다. 이에 비석을 (나중에) 세웠다”라고 본다. 문맥상 ‘어조사 이(以)’가 가리키는 문장은 산릉까지로 한정된다는 게 이유다.
주 교수는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왕릉에 매장한 뒤 비석을 세우는 데 최소 4∼5개월이 소요됐을 것”이라며 “이를 감안하면 비석을 세운 시점은 이듬해인 415년 1∼2월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비석 건립에 수개월이 소요된다고 보는 근거는 매장 직후에도 묘 앞에서 각종 제사가 이어진 당시 풍습과 더불어 수묘자(守墓者·묘지기) 관련 내용이 비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길이가 50m 안팎에 이르는 거대한 고구려 적석총을 관리하는 데 적지 않은 수묘자가 필요했는데 이를 지정·관리하는 것은 장례의 마무리 절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를 전제하면 41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호우)의 의미도 달라진다. 장수왕이 415년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동시에 이를 기념한 물품으로 배포한 게 호우총 청동그릇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청동그릇 밑바닥에 새겨진 명문(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가운데 ‘십(十)’자는 같은 종류의 기념품을 여러 개 제작한 것으로 해석됐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 건립과 동시에 기념품을 여럿 만들어 신라에까지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이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주 교수는 “광개토왕비가 국내용 기념물이라면 청동그릇은 신라 등 멀리 있는 속민(屬民)들에게까지 선왕의 업적을 과시한 것”이라며 “광개토대왕 시대를 마감하면서 장수왕 시대의 새로운 출범을 대내외에 선언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415년 건립설의 근거가 되는 주 교수의 명문 해석에 이견이 있지만, 장수왕 중심의 접근법은 의미가 적지 않다는 반응이다. 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광개토대왕비 해석에서 그동안 그늘에 가려진 장수왕의 의지를 강조한 시각은 참신하고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