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休]봄바람 따라 쉬엄쉬엄… 시간마저 느릿느릿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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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섬’ 전남 보길도-청산도

청산도에 가면 걸음은 물론이고 생각까지도 느려진다. 그래서 시계마저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데 그건 이 섬에서 속도를 느끼게 할 빠른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다. 그런 만큼 청산도에서의 체류는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준다. 지난 주말 슬로걷기 1코스 주변의 유채꽃밭.
청산도에 가면 걸음은 물론이고 생각까지도 느려진다. 그래서 시계마저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데 그건 이 섬에서 속도를 느끼게 할 빠른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다. 그런 만큼 청산도에서의 체류는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준다. 지난 주말 슬로걷기 1코스 주변의 유채꽃밭.
《도도한 춘색에 발바닥이 근질거린다. 이 화창 찬란한 봄볕을 무시한 채 집 안에서 뒹굴기란 죄 아닌 죄라 할 수 있다. 어디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그래서 이리저리 기웃대다 찾은 게 ‘1박 2일 보길도·청산도 기차여행’(패키지). 보길도(전남 완도군)라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권(1993년 발간)을 통해 유적답사의 베스트·스테디셀러로 오른 명소. 청산도(전남 완도군) 역시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서편제’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이젠 ‘슬로걷기 1번지’가 된 느림의 섬이다. 마침 지금은 ‘2016 슬로걷기 축제’(4월 1∼30일)도 한창. 게다가 기차로 이동해 버스로 관광하는 패키지는 청산도로 상징되는 ‘슬로운동(Slow Movement)’에 잘 부합한다. 이젠 여행에도 ‘느림’의 가치를 담아내는 현명함과 지혜가 필요한 때다.》

8일 오전 8시 반. 용산역에서 광주(송정리역)행 KTX에 올랐다. 100분 남짓해 도착한 광주. 남도는 남도다. 쌀쌀한 서울의 아침과 달리 포근하다. 첫날 행선지는 보길도. 고산 윤선도 선생(1587∼1671)이 유유자적하며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짓던 세연정을 찾아서다. 보길도는 해남의 땅끝 갈두항에서 카페리로 오간다. 광주까지 제각각 고속철로 온 여행객이 역 앞의 관광버스에서 모두 모였다. 해남을 가자면 거치게 되는 강진. 그래서 점심식사는 거기서 한정식으로 든다. 그런 뒤 다산기념관에 잠시 들렀다 해남으로 향했다.

선비의 유유자적… 원림(園林)의 세연정

고산 윤선도 선생이 보길도에서 유유자적할 당시 직접 조성한 세연지의 정자 세연정. 사방의 들문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멋진 건축이다.
고산 윤선도 선생이 보길도에서 유유자적할 당시 직접 조성한 세연지의 정자 세연정. 사방의 들문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는 멋진 건축이다.
오후 2시. 관광버스를 실은 카페리가 땅끝 갈두항을 떠났다. 봄 바다는 연무로 푸른색을 머금은 잿빛.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며 목이 그 따사로운 볕 아래서 펴지는 듯했다. 출항한 지 35분. 페리는 노화도에 닿았다. 보길도는 이 섬을 가로지른 뒤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고산이 지은 정자 세연정까지는 부두에서 버스로 15분. 실로 17년 만이었다. 세연정, 아니 이 보길도를 찾은 게. 바뀐 것은 없어 보였다. 보길대교와 정비된 진입로 외엔. 하지만 느낌은 달랐다. 그땐 몰랐는데 고산이 보길도에 머무는 내내(1631∼1646년) 조선은 안팎으로 격동에 시달렸던 사실 때문이다.

중국에선 떠오르는 청(후금)이 시들어가는 명의 숨통을 조이고 득세했고 조선에선 인조(1623∼1649)가 병자호란(1636년) 중에 남한산성에서 청에 항복, 삼배구고두(머리를 세 번 조아리며 그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땅바닥에 찧는 것) 후 와신상담 중이었다. 청에 볼모가 되었던 소현세자는 귀국 후 외국문물 수입을 설득하다 그걸 친청이라고 고깝게 여긴 인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 난국의 험사가 선비의 유유자적 동안에 동시에 존재했다니…. 그땐 알아채지 못하고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세연정과 그 앞에 조성한 연못 세연지의 풍광과 운치. 주변의 동백 숲과 어울려 그리도 멋질 수가 없다. 내 기억 속의 것보다 훨씬 더했다. 그런 느낌도 나이를 먹으며 갖는 변화려니 싶다. 그런 점에서 예전 여행지를 다시 찾는 것도 해볼 만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세연정의 건축미다. 사방으로 문을 내고는 그 문을 위로 들어 걸어 둔 들문이 상징하는 자연관조의 의식. 연못과 주변 숲은 물론 새소리와 햇빛까지 정자 안에서 보고 듣고 즐겼을 테니 자연과 소통이 없을 리 없다.

연못에 조성된 일곱 바위(칠암·七巖)도 배치가 예술적이다. 여기가 어딘가. 어부사시사며 오우가가 태어난 그곳이다. 그리고 그건 자연을 관조하며 즐길 줄 아는 선비의 정신적 여유가 그 소산이다. 주변의 원림(園林) 역시 같다. 아쉬운 건 우리에게 그런 여유가 없다는 사실. 그러니 세상은 더더욱 각박해질밖에. 고산이 누린 그 유유자적이 부럽기만 하다.

아리랑 곡조만큼만 느리게 또 느리게

울창한 숲이 둘러싼 보길도의 예송리 몽돌해변.
울창한 숲이 둘러싼 보길도의 예송리 몽돌해변.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서편제’(1993년). 청산도는 그 영화를 통해 이 땅에 다시 태어났다.

임권택 감독과 배우 오정해에게 쏟아진 찬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영광과 더불어. 방문객 수가 그걸 웅변한다. 2011년에 이미 33만 명을 넘어섰다니 이젠 40만 명쯤 되지 않았을까. 영화에 등장하기 전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했던 섬의 변신.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섬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환경은 척박하고 식량 자급은 언감생심이다. 300m 내외의 산 일곱 개로 이뤄진 둥근 소라 모양의 섬엔 아직도 평지와 물이 귀하다. 그렇다 보니 논밭은 죄다 산등성을 잘라 개간한 계단식. 지게에 지어 온 돌을 하나하나 어렵사리 끼워 쌓아 만든 축대가 그 계단논밭의 밑천이다. 그런 계단논엔 물대기도 초인적 의지의 산물이다. 논바닥에 들인 구들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등성 계단논의 물은 그걸로 끌어들여 담았다가 또 내보냈다.

그래서 쌀은 늘 모자랐다. 섬에서 보리농사가 주업이 된 것도 그 때문. 1990년대에 외부로 알려질 당시 청산도의 봄 풍광이 웃자란 청보리 밭이었던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지난주에 가보니 크게 바뀐 모습이다. 보리는 거의 볼 수 없고 노란 유채꽃밭 일색이다. 슬로시티 인증(2007년) 후 슬로걷기 무대로 바뀌면서 온 변화란다. 보리 수확보다는 걷는 이의 걸음을 느리게 할 꽃밭 풍경이 더 절실해서다. 산등성을 덮은 유채꽃은 4월부터 6월까지 푸른 바다와 어울려 이 청산도를 아름답게 연출한다.

섬 곳곳을 잇는 슬로걷기 코스(11개)는 일부러 개발한 게 아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고 이정표를 붙인 것뿐이다.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청산도항에서 이어지는 1코스. 서편제에서 세 식구가 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며 지나는 장면의 무대가 여기 있다. 1코스 길은 계단논밭의 산중턱을 가로지른다. 산 아래 바닷가마을(도락리·당리)로 이어지는 길도 여기서 가지치기 한다.

1박 2일 일정의 단체여행객은 청산도에서 세 시간 정도 머무른다. 그래서 1코스에서도 화랑포까지만 걸어야 했다(왕복 90분 소요).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섬의 명물인 돌담길은 물론 수선화 꽃길과 해송숲길, 드라마 촬영세트장(피노키오, 봄의 왈츠, 여인의 향기)에 마을기업이 운영하는 야외카페까지 두루 둘러볼 수 있었으니. 물론 아쉬움은 컸다. 그래서 이렇게 다짐하고 돌아왔다. 다음엔 꼭 하룻밤 묵으며 천천히 걸어보리라고.
 
청산도(전남 완도군)에서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슬로시티 청산도 패키지:
코레일관광개발(www.korailtravel.com)은 KTX와 무궁화호로 다녀오는 다양한 상품을 내놓았다. 일정과 가격(2인1실 주중 1인 기준)은 출발역과 요일별로 다르다. ▽수도권 출발(용산·광명역) △1박 2일: KTX이용, 강진·땅끝·대흥사 포함. 연중 매일 출발(25만 원부터) △무박 2일: 무궁화호(밤 11시 10분) 이용, 강진 포함. 수·금요일 출발(12만5000원) ▽경북 출발(영주역): KTX이용, 땅끝·대흥사 포함. 연중 매일 출발. 1박 2일(28만2000원부터) ▽전북 출발(익산·전주역): 무궁화호 이용, 청산도만. 연중 토·일요일 출발. 당일(7만9000원) ▽경남 출발(부전·구포역): 무궁화호 이용, 보성차밭 포함. 연중 화∼토요일 출발. 1박 2일(18만7000원부터). 고객센터 1544-7755

청산도: 사철 언제 찾아도 좋다. 유채꽃은 6월 초까지만 핀다. ‘슬로걷기’축제는 4월 30일까지. 11개 슬로걷기 코스는 선착장에서 나눠주는 지도에 상세히 나와 있다.

교통: ◇서울∼완도 ▽철도: 광주까지만. 광주∼완도는 고속버스 이용. KTX 용산∼광주(송정리역) 1시간 30분 소요 ▽고속버스: 서울센트럴시티(호남선)터미널∼완도 5시간(하루 4회). 광주 2시간, 목포 1시간 30분 소요. 완도터미널 064-552-1500 ▽손수운전(고속도로) △호남선: 광주∼강진∼해남∼완도 △서해안선: 목포∼해남∼완도 ◇완도∼청산도(카페리): 50분 소요. 4월(축제 중)엔 하루 10∼12회, 평소엔 5회(3∼10월)나 4회(10월∼이듬해 2월). 선착순 탑승 ◇청산도 섬 내: 차가 필요 없다 ▽슬로시티 순환버스: 주요 관광지를 운행. 어른 5000원 △택시: 운행 중

문의: 상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참조. ◇슬로시티 청산도 홈페이지: www.cheongsando.or.kr ◇청산도 김작가: www.cheongsando.net
#보길도#청산도#세연정#서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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