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리’란 유행가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고 있었는데 이 가사가 바로 대구시내 모 고등학교 재학생이 지은 것이라고. … 학교 당국에서는 혹시 자기 학교 학생이 지은 것이나 아닌가 하고 벌벌 떨면서 그 작자(作者)를 색출하느라고 학생들의 신체 수색까지 한 일이 있다고도 한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둔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급서하자 조 박사를 애도하는 노래가 퍼지고 있다며 동아일보가 1960년 3월 9일자에 보도한 내용이다.
19일 56주년을 맞는 4·19혁명과 대중가요, 영화 등의 관계를 다룬 학술대회가 최근 열렸다. 고려대 박물관 등의 주관으로 개최된 ‘4월 혁명과 문화의 새로운 모색’에서 이준희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발표문 ‘혁명의 노래, 미완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전 ‘유정천리’를 개사한 노래가 전국으로 구전되며 끓어오르는 대중의 심리를 절실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59년 10월 개봉된 영화 ‘유정천리’의 동명 주제가가 호응을 받았는데, 이 노래는 조 박사의 서거와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등을 거치며 새로 탄생했다. “경북대사대부고 학생 3명이 개사한 이 노래가 2·28민주운동(1960년 대구 고교생들이 이끈 민주화 시위)의 서막을 장식했다”는 증언(본보 2010년 4월 19일 보도)도 있다.
대중가요의 히트가 유력 야당 대통령 후보의 죽음과 관계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1956년 발표된 ‘비 내리는 호남선’(손로원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이다. 그해 5월 신익희 민주당 후보는 대통령 선거 투표 열흘을 앞두고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이동하던 중 열차에서 쓰러져 급서했다. 이 노래는 신 후보의 죽음을 모티브로 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널리 사랑받았다.
하지만 이 교수는 4·19혁명 뒤 대중음악계의 대응이 미진했다고 봤다. ‘4·19와 유정천리’ ‘사월의 깃발’을 비롯해 10여 곡이 발표됐지만 상투적 표현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 노래들은 혁명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고, 이후 혁명 자체가 미완으로 남으면서 노래 또한 안착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함충범 일본 나고야대 객원연구원도 ‘4·19혁명이 영화계에 미친 영향 고찰’을 냈다. 그에 따르면 4·19혁명 뒤 민간 심의기구가 관청의 영화 검열을 대체했고, 당대의 현실을 진지하게 묘사한 수작 ‘오발탄’도 1961년 4월 개봉됐다. 함 연구원은 “영화법 도입, 국립영화제작소 설치, 비정부 기관의 영화 심의,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 등 한국 영화계의 굵직한 이슈들은 모두 4·19혁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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