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의 한 수]LG배 하면 역시 이창호 9단…유럽서 첫 기전 등 수많은 ‘최초’ 기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0일 03시 00분


LG배 세계기왕전

《올해 20주년을 맞는 LG배 세계기왕전은 1974년 출범한 국내 타이틀전인 기왕전의 협찬을 LG가 맡고 세계 기전으로 전환하면서 1996년 6월 탄생했다. 바둑계의 여러 영웅들이 이 대회에서 혈투를 벌였고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
2000년 국내 타이틀을 2개나 따며 승승장구하던 이세돌 9단(오른쪽)이 이창호 9단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초반 2연승. 그것도 완승이었다. 하지만 유리한 3국을 놓치더니 4, 5국마저 연패해 대역전패를 당했다.
2000년 국내 타이틀을 2개나 따며 승승장구하던 이세돌 9단(오른쪽)이 이창호 9단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초반 2연승. 그것도 완승이었다. 하지만 유리한 3국을 놓치더니 4, 5국마저 연패해 대역전패를 당했다.
LG배 하면 역시 이창호 9단이다. 특히 1999년 3회 대회 이창호의 우승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본선 1, 2회전이 끝나고 8강에 오른 한국 기사는 이창호 단 1명이었다. 4강의 나머지 세 자리는 모두 중국 기사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중국 언론들은 “중국 기사가 아무리 많이 올라가도 이창호 9단이 남아 있으면 우승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는 한국으로선 다행스럽게도 현실이 됐다. 이 9단은 3회를 포함해 1, 5, 8회 대회에 우승하면서 LG배를 자신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5회 대회 결승전도 짜릿한 승부였다. 이 9단은 당시 승승장구하던 신예 이세돌 9단에게 2연패했다. ‘이세돌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모두 예상했지만 이창호 9단은 3연승으로 역전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창호 9단의 통산 100번째 우승이었다.

그러나 이세돌 9단은 2년 뒤 7회 대회에서 ‘지고는 못 사는’ 승부사답게 이창호 9단을 3-1로 꺾으며 설욕에 성공했다. 2008년 12회 대회에서도 창하오, 왕레이, 장쉬, 후야오위 9단 등 중국과 일본의 맹장들을 모두 누르고 우승했다.

유창혁 9단은 다른 국제대회에서 1회 이상 우승하며 맹위를 떨쳤지만 유독 LG배에서만큼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1, 2, 4회 모두 결승에 올랐으나 모두 준우승에 그친 것. 마침내 6회 대회에서 조훈현 9단을 꺾고 한을 풀면서 모든 세계 기전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10회 대회에서는 22세 청년 구리 9단과 16세 소년 천야오예 9단 두 중국 기사가 패권을 놓고 겨뤘다. 중국 돌풍의 신호탄이었다. 구리는 2009년 13회 대회 결승에서 당대의 라이벌 이세돌 9단과 ‘백담사 대결’을 벌여 우승한다.

13∼18회 대회는 중국 기사들이 휩쓸었지만 19회 대회에서 박정환 9단, 지난해 20회에선 강동윤 9단이 우승하면서 한국 기사들의 보루가 됐다.

새로운 시도 계속해

2009년 막 세계 1인자로 부상하려는 구리 9단 앞(오른쪽)을 이세돌 9단이 가로막았다.그러나 당시 컨디션이 안좋았던 이 9단은 구리 9단에게 0-2로 무릎을 꿇었다. 구리 9단은 LG배에서 유일하게 2번 우승한 외국 기사가 됐다.
2009년 막 세계 1인자로 부상하려는 구리 9단 앞(오른쪽)을 이세돌 9단이 가로막았다.그러나 당시 컨디션이 안좋았던 이 9단은 구리 9단에게 0-2로 무릎을 꿇었다. 구리 9단은 LG배에서 유일하게 2번 우승한 외국 기사가 됐다.
이름난 기전인 만큼 ‘최초’ 타이틀도 많다. LG배 세계기왕전은 1996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1회 대회 8강과 준준결승전을 개최해 해외에서 열린 최초의 기전이 됐다. 5회 대회는 8강전을 프랑스 파리에서 열었다. 한국 주최 국제 기전이 유럽에서 대회를 연 것은 전무후무하다. 이 기전은 바둑 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생중계를 시도했다. 중국 CCTV가 실황을 중계한 최초의 국제 바둑대회도 LG배(2회 대회·상하이)다.

흑이 부담할 덤의 크기를 6집 반으로 적용한 최초의 국제대회도 LG배 세계기왕전이다. 3회 대회부터 적용됐는데, 당시는 한국과 일본의 거의 모든 기전이 5집 반 공제를 적용하던 시절이었다. 현대 바둑에서 커진 선착(先着)의 이득 때문에 기사들 대부분이 흑번을 선호하던 시절이었다. LG배 이후 여러 국내외 기전이 6집 반 공제로 룰을 바꿨다.

11회 대회는 중국의 후야오위 9단과 대만의 저우쥔쉰 9단이 결승에서 맞붙어 세계 최초로 양안(兩岸) 결승을 치렀다. 서양 출신의 기사가 국제 바둑 행사에서 동양 고수를 이기는 이변도 연출됐다. 2회 대회 1회전에서 유럽 대표 한스 피치가 일본의 맹장 요다 노리모토 9단을 반집 차로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다.

흥미로운 징크스들



LG배 우승자는 이듬해 2연패는커녕 초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징크스가 있다. 2회 대회 우승자인 왕리청 9단은 3회 대회에서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대만의 저우쥔쉰 9단에게 패해 첫판에서 탈락했다. 4회 대회 우승자인 위빈 9단도 5회 대회 첫판에서 탈락했다.

이창호 9단도 3회 대회 우승으로 바둑계를 통일하는 분위기였지만 4회 대회에서 준결승에서 유창혁 9단에게 패했다.

한편 이창호를 꺾은 기사는 그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다는 ‘이창호의 저주’도 있다. 4회 대회 우승자이기도 한 위빈 9단은 9회 대회에서 이창호 9단을 꺾고 결승까지 올랐지만 일본의 장쉬 9단에게 1국을 이기고 2∼4국을 연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神의 한 수#lg배#이창호#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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