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돔은 장엄함으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 사원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아랍어 캘리그래피와 기하학적 무늬는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기도 시간이 되자 신자들은 일제히 동남쪽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했다. 99개의 창을 통과한 빛이 사원 안을 은은하게 감쌌다. 모스크 안 세상은 빈틈없이 정연했다.
불가리아, 그리스와 맞닿은 터키 서북부 도시 에디르네. 이곳에 자리 잡은 셀리미예 모스크는 오스만튀르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로 꼽힌다. 이 모스크를 만든 이는 미마르 시난(?∼1588년)이다. 미마르는 터키어로 ‘건축가’라는 뜻이다. 시난은 이슬람 문화와 건축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술레이만 1세 시절 궁정 건축가가 된 시난은 셀림 2세와 무라드 3세 때까지 활동하며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지었다. 그는 당시까지 도시마다 달랐던 건축 스타일을 하나로 통합했다. 거대한 돔 건축물과 그 주변 세워진 높은 첨탑인 미나레트를 특색으로 하는 오스만식 건축 양식은 시난 시절 확립된 것이다.
“돔 아래선 모두가 하나가 되는 느낌”
시난이 80대였던 1574년 완성한 셀리미예 모스크는 그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칭한 건축물이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모스크의 넓이는 1620m², 높이는 43.3m다. 특히 지름 31.2m인 돔의 무게는 2000t에 이른다. 사실 셀리미예는 동로마제국 시절 그리스도교 대성당으로 이스탄불에 세워진 하기아 소피아(537년)와 모양새가 닮았다. 건축가로서 시난이 마음에 담은 목표가 하기아 소피아였기 때문이다. 셀리미예는 돔의 크기는 하기아 소피아와 비슷하지만 높이는 54m인 전자에 다소 못 미친다. 그러나 구조적 안정감과 논리적 정교함에선 하기아 소피아를 능가한다. 8개의 기둥과 아치로 받쳐진 거대한 돔은 정사각형 외벽으로 부드럽게 연결됐다. 실제로 하기아 소피아가 지진으로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해 왔다면 셀리미예는 17세기, 18세기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1913년 불가리아가 에디르네를 점령했을 당시 모스크는 대포 공격을 받았지만, 돔 일부에 작은 흔적만 남았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사원 안에 더 많은 창을 내고 내부에 빛을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 역시 튼튼한 구조 덕분이다.
수피 사치 터키 바키프대 건축학과 교수는 “시난은 모든 오스만 건축의 표준을 만들었다. 특히 셀리미예만큼 완벽한 구(球) 형태의 거대한 돔을 올리는 것은 시난 이후의 제자들도 실패했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셀리미예는 사원으로 쓰인다. 매주 금요 기도회에는 5000∼6000명의 이슬람 신도가 이곳을 찾는다. 셀리미예는 대형 기도회에 최적화돼 설계됐다. 기둥을 벽 쪽으로 밀착시켜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을 없앴고, 메카의 방향을 알리는 미흐라브를 비롯한 니치형 벽감은 이맘의 목소리를 확산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 사원의 타메르 발라트 이맘(이슬람 성직자)은 “하나의 돔 아래서 모두가 함께 있는 느낌을 얻는다”고 했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한 오스만의 ‘미켈란젤로’
시난은 종종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미켈란젤로(1475∼1564)와 비교된다. 다재다능한 재주를 가졌고, 신에 대한 신실함을 바탕으로 재능의 최대치를 이뤄 낸 천재라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다만 활동 무대의 넓이와 작업량만 비교한다면 시난은 미켈란젤로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시난의 건축물은 오늘날 헝가리,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시리아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80여 개 모스크를 비롯해 그가 참여한 건축물은 400여 개에 이른다.
이 시절 시난이 이처럼 많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였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난의 손을 거친 통일된 형식의 건축물들은 오스만이 지배한 땅에 소속감을 부여하며 제국의 통합에 기여했다. 최근 터키 문화관광부가 시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건축 기행도 생겼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터키 관광이 이슬람을 벗어나 기독교 성지 순례나 오스만 이전 역사 유적지에 집중됐다면 시난을 중심으로 한 기행은 정통 이슬람 문화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에디르네 지역을 관할하는 마흐무트 샤힌 트라키아 주정부 개발공사 사장은 “이스탄불과 트라키아 주정부가 연대해 ‘미마르 시난의 건축 기행’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진정한 터키의 문화예술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시난은 10대에 오스만 제국 내 이교도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부대 예니체리에 징집된 뒤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의 근위병이 됐다. 당시 공병으로서 여러 지역을 두루 다녔던 경험은 훗날 그의 건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오스만식 건축은 고대 로마의 아치나 높이를 추구했던 중세 유럽의 건축, 비잔틴 건축의 돔 양식 등 다양한 문화의 건축양식을 실용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술레이만 1세 시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인 이스탄불은 시난이 수습 시절 참여했던 건축물부터 그가 참여한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천재라는 칭송을 들었던 이 건축가는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이뤘던 노력파이기도 하다. 시난의 건축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돔의 크기가 커지는 한편 내부 공간의 효율성도 높아진다.
특히 술레이만 1세를 위해 만든 술레마니예 모스크(1557년)는 셀리미예 모스크와 함께 시난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오스만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시난은 술레마니예에 대해 ‘진정한 첫 작품’이라고 했다. 골든혼이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의 서쪽 언덕 위에 세워진 이 모스크는 웅장한 세련미가 특징이다. 길이 59m, 너비 58m(3422m²)의 거대한 사원에 지름 26.2m의 거대한 돔이 49m의 높이로 올려져 있다. 모스크를 중심으로 200m 근방에 위치한 신학교와 병원 목욕탕 식당 숙소 등을 포함해 쿨리예라 불리는 사원 주변 시설을 돌다 보면 ‘대제’라고 호칭되는 술레이만 1세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미술 사학자인 안현배 씨는 “셀리미예와 술레마니예 모스크는 이후 오스만 건축 양식의 표본이 됐다. 한 사람의 생애 동안 이처럼 대규모의 건축물을 여럿 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을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술레마니예 모스크의 북쪽 주변에는 시난이 생전에 그 위치를 직접 골랐다는 그의 무덤이 있다. 무수하게 많은 대규모 건축물을 지었던 건축가의 무덤은 겨우 길 끝 모서리 몇 평을 채울 정도로 소박했다. 묘비에는 시난의 친구이자 작가인 사이 무스타파 첼레비가 쓴 글이 남겨져 있다.
“…성스러운 거장은 팔십 군데가 넘는 모스크를 지었네/그가 백수 넘게 살고 마침내 삶을 마감했으니/그가 누운 곳이 장미의 정원이 되었네…시난, 건축가들의 거장이 이제 떠났네/모든 사람들이여 그를 위해 파티하(이슬람 경전 꾸란의 한 구절)를 암송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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