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나 식당을 관람객들의 배고픔이나 갈증을 달래주기 위해 샌드위치, 샐러드 등 가벼운 요깃거리나 음료를 제공하는 곳으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최근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레스토랑은 이런 선입견을 산산조각 내며 뜻밖의 예술작품을 만난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뮤지엄이 갖는 ‘임장감(臨場感)’을 바탕으로 예술을 입힌 감각적인 공간, 세계 미식 인증서로 통하는 ‘미슐랭 스타’를 획득할 만큼 수준 높은 요리, 그 도시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이 녹아 있는 콘텐츠.
이쯤 되면 뮤지엄에 간 김에 식당에 들르는 게 아니라 일부러 뮤지엄 안의 식당을 찾거나, 아예 식당에 간 김에 뮤지엄을 관람하게 된다.
기분 좋은 주객전도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지금 최전선에서 ‘뮤지엄 다이닝’을 맛있게 달구고 있는 각국의 레스토랑 5곳을 모았다.》
벨 에포크로의 노스텔지아, 므시외 블뢰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장식적인 건물로 꼽히는 미술관 ‘팔레 드 도쿄’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관람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파리의 상징적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낸 곳이다.
그중에서도 1층에 있는 레스토랑 ‘므시외 블뢰(Monsieur Bleu)’는 우아하고 세련된 복장의 신사 숙녀들이 밤이 늦도록 문화를 향유하며 사교를 즐기던 벨 에포크(‘좋은 시대’란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풍요로웠던 파리를 일컫는 말)의 낙천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곳이다.
에펠타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드넓은 테라스, 10m가 넘는 층고,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제프 디랑이 디자인한 공간은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우아하면서 세련되고, 왠지 까다로우면서도 친근하다.
요리도 마찬가지. 고급스러운 코스요리만 즐겨야 할 것 같지만 브누아 다제르 셰프가 만든 메뉴들은 햄버거부터 푸아그라까지, 짧은 수다와 가벼운 휴식에도 어울릴 간편한 식사메뉴부터 비즈니스 미팅이나 중요한 가족 모임, 심지어 새벽까지 한잔 술에 곁들일 메뉴까지 두루 갖춰 어떤 상황에도 잘 맞는 사교 공간으로 다가온다.
특히 가장 프랑스다운 요리들이 주를 이루는데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라스를 가진 곳답게 계절을 반영한 재료로 맛을 낸다.
햇살이 좋은 따뜻한 저녁이라면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라스에서 환상적인 에펠 타워를 바라보며 저항할 수 없는 파리지앵의 우아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테라스는 5월에 개장해 9월까지 운영한다. 도심의 오아시스, 그레이트 코트 레스토랑
대영박물관 혹은 영국박물관으로 불리는 영국 최대의 국립박물관에는 격자무늬의 거대한 유리 지붕이 장관을 이루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있다. 그레이트 코트(Great Court)라는 곳으로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인 노먼 포스터의 작품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실내 광장이기도 하다. 그레이트 코트 중앙에는 3500여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원형 구조의 도서관 열람실이 있다. 높고 둥근 돔형의 천장 아래로 빛과 책이 가득한 장관이 또 하나의 볼거리다.
그레이트 코트 레스토랑은 그레이트 코트의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데, 박물관에 방문하거나 인근에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한 런던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았다. 매일 직접 구운 페이스트리와 짭조름한 스낵류를 유기농 찻잎으로 우려낸 고급스러운 차와 함께 맛보거나 신선한 샐러드와 나눠 먹을 수 있는 캐주얼한 요리들로 기분 좋은 점심 또는 저녁을 즐길 수 있다.
박물관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와 주제를 같이하는 특선 메뉴들도 선보인다. 따라서 전시와 함께 경험하면 더욱 기억에 남는 식사가 된다.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지식의 보물을 섭취하는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지만 런던 중심가인 홀본, 토트넘 코트 로드와 러셀 광장 튜브 역으로부터 불과 몇 분 거리에 있어 차분한 오후를 찾는 런더너들에게 도심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곳이다. 맨해튼 최고의 핫 플레이스, 언타이틀드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휘트니 뮤지엄이 지난해 5월 미트패킹 디스트릭트 갱스부르 스트리트로 이전하면서 새롭게 1층에 개장한 ‘언타이틀드(Untitled)’는 뉴욕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레스토랑으로 떠올랐다.
정육점이 즐비한 낙후지역이던 미트패킹 디스트릭트가 첼시 마켓, 하이라인 등의 랜드마크와 부티크 호텔, 디자이너 숍과 레스토랑들이 들어서면서 맨해튼의 핫 플레이스로 변모했는데, 휘트니 뮤지엄도 이곳에 합류한 것이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 렌초 피아노는 인근의 허드슨 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이 건물의 한 면을 통유리로 설계했다. 덕분에 언타이틀드의 테라스는 허드슨 강과 하이라인을 내려다보는 풍경과 맨해튼 최고의 선셋 뷰를 자랑한다.
미국 요식업계의 권위 있는 상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에서 2015년에 ‘아웃스탠딩 셰프’로 뽑힌 마이클 앤서니 셰프가 주방을 맡고 있다. ‘그래머시 태번’을 뉴욕의 대표 레스토랑으로 키운 그의 요리 솜씨를 이곳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됐다. 식사뿐만 아니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재구성된 미국의 클래식 디저트도 빠뜨릴 수 없는 추천 메뉴다. 라이징 스타 셰프의 텃밭 요리, 오티움
지난해 9월에 문을 연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더 브로드 미술관은 전시 공간 못지않은 레스토랑 ‘오티움(Otium)’을 미술관 바로 옆에 개장했다. 아트 컬렉터 엘리 브로드 부부가 LA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앤디 워홀, 제프 쿤스, 재스퍼 존스, 카라 워커 등 세계적 아티스트의 작품을 포함한 2000여 개의 개인 컬렉션을 공개해 만든 미술관이다. 그 옆의 레스토랑 역시 무겁기보다는 다분히 여유롭고 현대적이다. ‘오티움’이라는 이름도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제임스 비어드 재단이 2010년 ‘올해의 라이징 스타’로 선정해 실력을 주목받은 티머시 홀링스워스 셰프가 레스토랑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식재료와 로컬 재료를 이용해 기교 없이 덤덤하면서도 신선하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요리를 낸다. 베이컨·조개·생크림을 더한 부카티니, 건포도·아몬드·키노아를 곁들인 케일 샐러드, 가지·오이·병아리콩을 넣은 팔라펠 등이 요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주요 메뉴다. 미술관 레스토랑답게 데이미언 허스트의 사진을 대형 벽화로 이용한 외관 장식 또한 인상적이다. 최초의 미슐랭 뮤지엄 레스토랑, 네루아
세계 미식계가 인정하는 ‘미슐랭 스타’를 받은 미술관 레스토랑도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해 화제를 낳았으며 개관과 동시에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명소로 주목받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의 레스토랑 ‘네루아(Nerua)’가 그 주인공이다.
주방을 맡고 있는 호세안 알리하 셰프는 지역 농장에서 자란 채소와 비스케 만에서 잡은 해산물을 이용해 특유의 바스크 요리를 선보인다. “불필요한 것은 배제하고 가장 기본적인 재료를 이용해 본질에 충실한 요리를 만든다”는 게 이 레스토랑의 철학이다.
그래서인지 크지 않은 공간만큼 요리도 아담하다. 키노아와 세이지를 곁들인 앤초비, 타로토란·흰강낭콩·무를 이용한 요리 등 무늬 없는 흰 접시에 2, 3가지의 요소만 담아낸 요리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다.
기하학적인 곡선의 디자인으로 건물 자체가 도시의 전시 작품이 된 미술관, 그 안에서 만나는 군더더기 없는 지극히 간결한 레스토랑, 그리고 미슐랭 1스타를 수상한 창의적인 바스크 요리. 이만한 조합의 결과라면 빌바오 미술관의 인기가 아니더라도 스페인에서 꼭 가봐야 할 예약 필수 레스토랑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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