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현종이 온천으로 행차를 하였다. 임금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했지만 수행하는 군졸들은 오직 두 발로 그 뒤를 따르게 됐다. 임금을 태운 수레는 그저 수레가 갈 수 있는 만큼을 갈 뿐 뒤의 상황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시대로 바꿔 보면 높으신 분이 타고 가는 자동차 뒤로 호위 군인들이 걷고 뛰면서 뒤쫓아 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씨는 덥고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군졸들은 줄지어 쓰러졌고, 급기야 2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임금을 수행하였던 박세당은 임금에게 수레를 너무 빨리 몰지 말라고 건의를 하였다. 옛날에 좋은 일에는 하루에 50리를 가고 군사의 출정에는 하루에 30리를 간다고 하였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황급한 기색을 보이려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이동할 때에는 다 함께 갈 수 있는 적정선을 유지해야지 이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루에 갈 수 있는 최대치를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였다. “훌륭한 임금은 한 몸의 편안함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고생스러움을 잊지는 않습니다. 군졸들이 미천하기는 하지만 그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차마 그 죽음을 태연히 보면서 수레 모는 법을 바꾸려 생각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임금이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하니, 당시에 이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으리라 짐작만 해본다.
높으신 분들이 행차를 하면 아래에서는 제반 준비와 의전을 위해 수많은 일이 벌어진다. 위에서 의미 없이 던진 한마디 말 때문에 아래에서는 초비상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고, 과도한 의전으로 일반 대중에게 불편을 끼치기도 한다. 아랫사람들을 보살피려는 행차가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높으신 분들의 발걸음 하나와 의미 없는 말 한마디가 어쩌면 누군가의 목숨을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박세당(朴世堂·1629∼1703)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다. 새로운 경전 해석서인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는데 이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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