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선배의 조촐한 집들이에 초대받아 경남 거제 옥포에 다녀왔다.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은 선배는 부엌에서 해물된장찌개의 간을 보느라 분주했고, 선배의 아내는 7개월 된 아기의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탈(脫)서울에 이어 거제의 삶으로 옮겨갔다.
선배는 서울 홍익대 앞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비하인드’라는 카페를 창업한 4인방 중 한 명으로 목동의 잘나가던 수학 강사이기도 했다. 아내의 미술사 공부를 위해 영국 런던에 함께 유학 갔다가 서울에 돌아온 그들에게 어느 날 선물처럼 주어진 아이는 부부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입시 강사로서 그가 경험한 서울의 삶은 아이에게 주고 싶은 삶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탈서울을 대안으로 선택했다.
한 달 전 선배 부부가 우리 책방에 찾아왔던 날, 때마침 젊은 한의사 한 분이 우리 책방에서 책을 보고 계셨다. 그분도 아이들 때문에 3년 전 서울을 떠나 경북 경주로 와서 일주일에 사흘만 진료하며 아이들과 마음껏 자연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 동네 이층 주택에도 서울서 마케터로 열심히 일하다가 아이를 낳으면서 경남 통영에서 새 삶을 시작한 이가 있다. 그 부부 역시 아기를 위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아이가 없어서 그렇게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곳이 아이를 키우기에는 훨씬 좋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소박한 작은 도시의 삶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챈 부모들의 반란이랄까.
최근 아이들의 공부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서울 강남의 엄마들이 시험을 앞둔 여덟 살 아이에게 12만 원짜리 두뇌 활성화 주사를 맞힌다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몇몇 극성 엄마들의 이야기겠지만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서울에서 함께 통영으로 내려온 직원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문예창작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 깊은 산골에서 나고 자란 동기가 있었는데, 시를 배운 적도 없는데 선배들도 놀랄 만큼 거침없이 시를 쓰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문학적 감성을 따라가기 어렵더란다. 그런데 통영에 살아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고 무릎을 쳤다.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에서 자라난 사람과 산과 바다를 곁에 끼고 자연의 벗으로 자란 이의 감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예향의 도시, 통영이다.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그리고 통영12공방의 전통 장인들까지 뛰어난 문화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통영의 자랑 박경리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 통영은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다.” 자연의 가르침, 생명의 교육은 12만 원짜리 주사 수십 대를 맞아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문화적 감성과 예술가의 상상력, 창의력을 선물한다. 아이를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바로 지금, 탈 서울을 감행하는 이유다.
※필자(43)는 서울에서 광고회사, 잡지사를 거쳐 콘텐츠 기획사를 운영하다 경남 통영으로 이주해 출판사 ‘남해의봄날’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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