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출발해 기차로 두 시간을 달려 잉글랜드 서쪽 마지막 도시인 체스터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웨일스 지역 전문가이면서 여행 가이드인 존 하드윈 씨를 만났다. 시계를 빠져 나가자마자 웨일스 영역에 왔다고 알려준다. 두 가지가 확연히 차이난다. 하나는 저 멀리 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솟아있다. 구릉과 평야가 대부분인 잉글랜드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 두 번째는 교통과 관광안내 표지판이다. 암호같은 알파벳과 영어표기가 항상 붙어있다. 웨일스어다. 영국 땅이지만 다른 역사 문화를 가진 웨일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웨일스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어릴 적 음악시간에 배운 웨일스 민요가 간혹 있었고 프로축구 선수 라이언 긱스가 이곳 출신이란 것 외에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우리나라에선 전무하다시피한 낯선 지역이다. 국내 대형서점조차도 웨일스를 단일 주제로 한 책이 거의 없었다.
웨일스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와 더불어 오늘날 영국의 한 축이다. 이 지역은 일찌기 북해에서 진출한 켈트인의 땅이었다. 1∼5세기 로마에 지배당했고 그 후 작은 왕국들로 나뉘다가 1282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정복한다. 이때부터 장남을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라 칭했는데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536년엔 헨리 8세에 의해 완전히 합병된다. 한마디로 북방 켈트인들이 살던 곳이 앵글로색슨이 주류인 잉글랜드에 정복된 나라다.
오늘날 인구는 300만 명이 조금 넘는다. 총 면적은 2만779km²로 딱 전라도 크기다. 주민들도 인정이 많다. 진화론의 선구자 러셀 월리스, 인도와 히말라야 전역을 답사해 지도로 만든 에베레스트 경, 영화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캐서린 제타존스의 고향이 이곳이다. 양의 수가 사람 수보다 4배 많은 1200만 마리다.
기자를 태운 차는 초록빛 풀밭과 양들이 수 십 번씩 반복되는 언덕을 오르내린다. 윈도 컴퓨터 초기화면에서 익숙하게 본 지형이다. 산자락 중턱에 차가 멈춘다. 가이드 하드윈 씨가 “저만의 비밀 전망대입니다” 하며 나무 사이를 가리킨다.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다. 언덕 아래 펼쳐진 풍경은 중세 마을 모습 그대로다. 멀리 바닷가 바짝 붙어 콘위 성이 거인처럼 서있고 언덕 아래 마을을 빙 둘러 성벽이 병풍처럼 바깥 세계를 향해 굳게 막아서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바다 위엔 수백 척의 요트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웨일스에는 콘위 성 외에 카나번 성 등 고성들이 641개나 된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콘위 성을 찾았다. 완공하는 데 만 4년(1283∼1287년)밖에 안 걸린 초고속 성채다. 그런데도 견고하게 지어져 보존 상태가 좋아 중세 고성 연구에 중요한 성이다. 불행히도 이 성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침략해 쌓은 잉글랜드 성이다. 고성 해설사 윌리엄스 씨는 “친구들이 내게 왜 하필 잉글랜드가 정복해 만든 성에서 일하느냐”며 핀잔을 준다고 한다. 이어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한다. “그때마다 저는 말하죠. 역사는 역사고 오래전 이야기다. 지금 이 성 꼭대기에 있는 깃발을 보세요. 바로 웨일스 깃발 아닙니까? 뭐가 문제죠?” 일행은 웃음과 함께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수백 년 고성 망루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스노든 산맥을 바라본다. 성 안의 잉글랜드인들과 성문 밖 웨일스인들을 떠올려 본다. 산 주변 마을에서 척박하게 살아가는 웨일스인들에게 이곳은 동화 속 꿈같은 도시였으리라.
위용 있는 산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그만큼 거칠고 야외 스포츠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가장 높은 산은 북쪽에 자리한 스노든 산(1085m).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도 이곳에서 등반 훈련을 했다. 강원도 설악, 금강을 품은 태백산맥의 위용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이곳엔 유명한 전설이 숨어있다. 바로 아서왕의 이야기! 가이드 하드윈 씨가 스노든 산을 가리키며 아서왕의 전설을 설명한다. 원탁의 기사 랜슬럿 경과 왕비 기네비아, 마법사 멀린과 보검 엑스칼리버 전설의 주인공인 아서왕이 바로 저 산에서 활동했다는 것. 하지만 실제 아서왕의 존재는 확인된 바 없다. 오늘날 잉글랜드 주류인 색슨인들을 물리쳤다는 영웅담이 윤색돼 웨일스의 영웅으로 변신한 거다. 1000m가 겨우 넘는 산들에 그런 영웅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살짝 미소가 나온다.
영국관광청과 웨일스관광청이 올해를 ‘모험의 해(Year of Adventure)’로 정하고 내국인들과 외국 관광객들을 향해 천혜의 자연환경을 즐기라고 손짓을 보내고 있다. 콘위 성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숲길로 이동했다. 스노도니아의 산을 만끽하는 데는 산악자전거와 카약 타기가 최고다. 수천 년 원시림 사이로 봄꽃들을 감상하며 봄바람과 맞부딪쳐 본다.
호수 위엔 봄을 즐기려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이미 여기저기 발걸음을 하고 있다.
카약 조교로부터 스트레칭과 노젓기 학습을 마치고 카약에 올랐다. 저 멀리 스노든 산 정상이 대장처럼 우뚝 서있다. 호수 가장자리엔 나무들이 물 속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나무 숲 사이를 가로질러 여기저기 움직여 본다.
탐험가가 따로 있으랴. 노젓기에 집중하고 자연에 취하다 보니 잠시 현실감을 잊을 정도다. 그렇다! 여기는 웨일스의 자연 한가운데다.
웨일스=이훈구 기자 ufo@dong.com
▼소박한 마을, 예쁜 건물… 중세가 눈앞에!▼
소소한 기쁨 주는 웨일스 구경거리
[1] 도자기마을 포트메이리언(Portmeirion):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마을 포르트피노를 동경해 20세기 초 만든 지중해풍 도자기 마을. 원색으로 칠해진 집들과 수십 개의 대리석상들을 감상할 수 있다. www.portmeirion-village.com
[2] 유기농 식당 보드넌트(Bodnant): 지역에서만 나오는 양·소고기, 야채, 과일 등으로 요리한 식당과 시장이다. 요리교실체험 프로그램이 있고, 미식가들에겐 필수코스. www.bodnant-welshfood.co.uk
[3] 영국에서 가장 긴 마을이름: 북동부 도시 뱅고어 옆, 작은 마을이지만 인기 있다. ‘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 뜻은 ‘빠른 물살 소용돌이 옆 흰 개암나무의 구덩이 속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굴의 성 티실리오 교회’라고 한다.
[4] 영국에서 가장 작은 집: 콘위 성 마을에 붙어있는 항구 바로 앞에 있다. 높이 3m 폭 1.8m로 마지막 거주자는 어부였는데 180cm가 넘는 거구였다고 한다.
[5] 콘위 캐슬 호텔(Conwy Castle Hotel): 성문 안 마을 중심가에 세워진 1570년대부터 운영해 온 고즈넉하고 유서깊은 호텔. 중세시대 집에 온 느낌이다. www.castlewales.co.uk
[6] 블랙보이 인(Black Boy Inn): 카나번 성 북문 바로 들어서자마자 보인다. 15세기부터 항구에 도착한 이들을 맞은 매우 오래된 숙소다. 예전에는 이 지역이 홍등가였다. www.black-boy-inn.com
도움말 문화지리학자 김이재 교수(경인교대)
△영국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britain.com △웨일스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wales.com △웨일스 투어가이드 존 하드윈 www.boutiquetours.co.uk Tel 0750-020-9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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