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불효자는 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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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어느 고을에 불효자가 살았다.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않자 이웃 사람들이 그를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관아에 고발하였다. 사또가 불효자를 부르더니 창고에서 쌀 서 말을 내어 주면서 말하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몇 리쯤 가면 어떤 사람이 있으니, 너는 거기 머물다가 쌀이 다 떨어지거든 돌아오너라.”

그 집에 도착했는데 마침 남편이 외출하고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다 문틈으로 보니 부인이 기름을 짜서 작은 항아리 두 개에 담아 마루에 올려놓고는 항아리를 이고 물을 뜨러 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한 노파가 방에서 기어 나왔다. 마루를 더듬다가 기름단지를 만지더니 욕을 하며 “저년이 어쩌면 이렇게 게을러터졌을까? 설거지를 마치고 물도 아직 안 버렸네” 하고는 기름단지 둘을 모두 땅에다 부어버렸다.

며느리가 돌아오다가 기름이 수챗구멍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황급히 달려 들어왔지만 기름단지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노파는 방안에서 며느리가 들어왔는지 묻더니 아까처럼 욕을 퍼부어댔다. 며느리는 조용히 잘못했다고 말하고 노인에게 수고를 끼쳐 죄송하다며 거듭 사죄하였다.

잠시 후 남편이 돌아왔다. 불효자가 인사를 할 때 부인이 문으로 나와 조용히 말하였다. “아까 기름을 짰는데 어머님께서 설거지물로 아시고 땅에 쏟아버리셨습니다. 혹시라도 말하지 마시고 어머님이 알게 하지도 마셔요. 괜히 노인 마음 상할지도 모르니(幸勿言, 勿使尊姑知. 恐傷老人心).”

남편은 방으로 들어가 문안을 드리고 부엌으로 왔다. 아내와 함께 닭을 삶고 죽을 끓여서 직접 들고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께 올리고 나와 손님에게 저녁을 대접하였다. 불효자가 곡식으로 갚으려 하니 주인은 굳이 사양하였다.

하룻밤을 지낸 불효자는 돌아와 관아 문 밖에 엎드렸다. 사또가 불러서 그에게 곧바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불효자는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더니 노모를 끝까지 봉양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관아에서 또다시 쌀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 불효자는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뒤에는 마침내 지극한 효자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강이천(姜이天·1769∼1801) 선생의 ‘중암고(重菴稿) 범행편(範行篇)’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신 노인을 봉양하는 일이 개인의 책임인지 사회적 영역인지 논의와 해법은 분분하지만, 그 기본은 사랑이라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강이천#중암고#범행편#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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