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18＞변화무쌍한 자연, 그 앞의 인간

윌리엄 터너의 ‘눈보라, 하버 만의 증기선’.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는 영국의 풍경화가입니다. 자연의 역동적 변화를 표현했지요. 화가의 그림 속 세상은 고요할 날이 없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사회로의 이행기였습니다. 도시가 팽창했고, 노동자가 증가했습니다. 급격한 변화는 반작용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차가운 도시에서 자연은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시절도 평온했지요. 다투기만 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19세기 초 평화 협약을 맺었거든요. 정치적 긴장이 누그러지자 사람들은 문명이 닿지 않은 풍경을 찾아 서둘러 여행을 떠났습니다. 국내외 여행 붐이 일었고, 덩달아 풍경화의 인기도 치솟았답니다.

화가도 여행을 즐겼습니다. 여행 책자와 스케치북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여행 중에 다채로운 자연 변화를 확인했고, 대가들의 위대한 풍경화를 만났습니다.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이었지요. 화가에게 자연은 조화와 질서가 완전히 구현된 장소가 아니라 변화무쌍해서 두려운 세계였습니다.

‘눈보라, 하버 만의 증기선’은 화가의 자연관이 깃든 풍경화입니다. 그림 전체에 성난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1842년 1월 증기선 에어리얼호는 유도등 신호를 따라 출항했습니다. 하리치 항을 떠나 항해 중이던 증기선이 성질 사나운 바람과 눈발을 만났습니다. 당대 문명을 상징하던 증기선도 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작은 배가 바람과 파도 사이에서 정신없이 흔들립니다. 그림 속 하늘과 바다, 자연과 문명은 불분명한 형태로 한데 뒤엉켜 있습니다. 눈보라가 불러일으킨 위태로움과 현기증의 순간을 거대한 색 덩어리로 거칠게 표현했군요. 자연의 진실에 바짝 다가가고자 획기적 방법을 시도했지요. 이런 예술적 접근으로 화가는 19세기 인상주의 미술과 20세기 추상미술을 예견한 선구자로 추앙받습니다.

요 며칠 바람이 거셌습니다. 대기의 움직임과 하늘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맑은 날 명료했던 세상의 윤곽이 무뎌지고, 색의 경계도 희미해졌습니다. 자연의 본질을 그리고자 돛대에 몸을 묶고 눈보라 속에 몇 시간을 있었던 고령의 화가가 목격한 풍경도 이러했겠지요. 잠깐 동안 온몸으로 감각했던 자연은 충분히 무시무시했습니다. 강풍에 시야가 막히자 꽁꽁 숨어 있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보이는 것에 정신 팔려 망각했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였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