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묵계종택의 보백당(寶白堂) 편액에 담긴 뜻이다. 조선 전기에 대사헌을 지냈으며 ‘대쪽의 정석’으로 일컬어지는 김계행 선생은 보백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고, 거처의 이름인 당호로 새겨 걸었다. ‘책 천 권을 쌓으니 높이가 키에 닿고, 기둥 아홉 개로 집을 지으니 무릎 들여놓기엔 족하다(貯書千卷高可等身 置屋九楹足以容膝).’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에 걸려 있는 주련들 가운데 한 부분으로, 소박한 집에서 책을 쌓아놓고 학문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선조들은 공유하고자 하는 뜻을 나무판에 글로 쓰거나 새겨서 건물의 필요한 위치에 걸어 두었다. 현판이라 한다. 교류하는 인사들이 남긴 시문, 집주인의 철학, 자녀에게 주는 교훈, 건물의 신축·중건 과정을 기록한 기문, 상량문 등 현판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집 이름을 새긴 ‘편액’과 좋은 글귀를 새겨 기둥에 건 ‘주련’이 대중적이다.
고택이나 정자에 으레 몇 점씩은 걸려 있기 마련인데, 장소의 사회적 의미가 깊거나 풍광이 아름다운 곳일수록 서까래 아래로 온통 돌아가며 각종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 있기도 하다. 1419년 건립된 남원의 광한루에는 세월의 숱한 격랑을 겪고도 남아 있는 것만 200여 점에 이를 정도다.
현판의 서체는 용도와 글의 내용에 따라, 단정하기도 하고 호기를 담고 있기도 하며 때로는 유려하게 그 뜻을 담아낸다. 편액에는 필획이 굵고 강건한 해서가 많이 쓰였고 주련은 서정적이거나 철학적인 내용을 행서나 초서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집의 규모나 역할에 따라 현판의 모양, 심지어 낙관의 크기며 위치까지도 달라졌으니,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에는 ‘活來亭(활래정)’ 편액이 여섯 점이나 걸려 있는데, 서체는 물론이고 판의 색깔이며 디자인이 모두 다르다. 이쯤 되면 현판은 글의 내용, 서체, 판의 디자인이 장소와 더불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품격 높은 예술품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는 현판이 사라졌다고 여길지 모르나,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현판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옛 형식을 그대로 따르기도 하지만 상황에 맞추어 변화하기도 한다. 일전에 방문했던 이름 높은 서예가의 양옥에서는 현관 입구 외벽에 편액, 주련, 주련의 순서로 걸려 있는 것을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한옥에서는 편액 좌우 기둥에 주련을 걸지만, 서예가의 공간에서 현판은 자유롭고 대범하게 제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서의 한 구절을 주로 상업공간에서 보게 되지만,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훌륭한 현판이다.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의 일주문 편액은 한글로 ‘운악산 봉선사’라 되어 있다. 대웅전에도 ‘큰법당’이라고 쓰인 편액과 네 기둥에 걸린 주련이 모두 한글이다. 한자에 서툰 현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편하게 다가가려는 의지의 발현이라 하겠다.
오가는 말과 행동이 거친 세상이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 간에 예의와 존중은 어디로 간 걸까? 이럴 때, 보백당과 열화당의 정신이 말없이 이어지고 실현되는 전달과 공감의 방식을 곱씹어 본다. 한문에 풍부한 의미를 담아도 좋지만 명확한 소통이 가능한 한글 현판도 의미 있는 변용이다. 한옥이라야만 제격이랄 것도 없다. 아파트도 좋고 상업공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전하려는 의도와 전달 방식이다.
삶의 중심을 잡아줄 철학, 사람 간에 전하는 위로와 축원이 필요한 때다. 알맞은 틀에 담아 더불어 소통하고 향유해 보자. 기왕이면 품격과 문화의 향기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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