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가수가 뭘 안다고 미술이냐. 지금까지 미술에 대해 쓴 책도 전부 출판사 직원이 대필(代筆)하고 이름만 빌린 거다’라고 하면, 나는 발끈해서 ‘저녁마다 꼬박꼬박 100쪽씩 쓴 증거가 있다. 고소할 거다’라고 길길이 뛸 거다. 그래야 책 몇 권이라도 더 팔릴 테니까.”
가수 겸 방송인 조영남 씨(71)가 2007년 펴낸 책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한길사) 서문의 일부다. 그가 60세 무명 화가에게 헐값의 수수료를 주고 그림 수백 점을 대신 그리게 했다는 논란이 일어난 시점에 다시 훑어보니 마디마디 씁쓸하다.
대작(代作) 화가의 폭로 직후 조 씨가 “미술계의 작업 관행일 뿐”이라고 해명한 데 대해 미술 작가들은 공분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아이디어 스케치와 돈을 건네며 완성 단계의 작품을 주문 제작하는 경우가 미술계에 흔하다는 얘기가 된다.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떨치기 어려운 생활고를 뚝심으로 견뎌내며 작업 공간을 거듭 쫓기듯 옮기면서도 묵묵히 캔버스 앞에 서서 붓을 움직이는 회화 작가들의 가슴에 조 씨의 말이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칭한 앤디 워홀 이후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등 현대미술의 스타 작가들이 보조 작가 집단을 거느리고 작품을 대량생산해왔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관행’은 아니다. 쿤스나 허스트의 화려하고 괴상한 설치 조각 작품과 다른 전통적 회화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동시대 인기 작가들의 선택에 강경히 저항한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나는 모든 작품을 내 손으로 그린다. 보조 작가를 쓰는 건 예술과 작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
그림 그리는 가수라며 ‘화수(畵手)’라 자칭한 조 씨의 책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현대미술은 ‘이름 미술’이나 다름없다. 화가가 유명한 이가 아니라면 그림 수천 점을 남긴다 해도 말짱 꽝이다.”
영화배우나 가수의 그림을 갤러리에 걸고 시장에서 매매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건 작품보다는 이름값 쪽이다. 이름값 제로의 화가들이 캔버스에 쏟아내는 건, 한 땀 한 땀 뽑아낸 삶의 몸부림이다. 관행 운운은, 그들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