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소재 M부티크의 O대표는 명품업계에서 ‘만물박사’로 통한다. ‘문·사·철’ 인문학에 해박하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회화뿐 아니라 서양 고전도 원전으로 읽는단다. 단테의 <신곡>을 자주 인용해서 언급하는가 하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따위의 불시(佛詩)나 엘리엇의 <황무지> 같은 영시(英詩)도 줄줄 읊는다.
O대표의 학력은 단골손님조차 정확하게 모른다. “관악산에서 청춘을 보내셨나요?” “신촌 어느 미용실 단골이었나요?” 손님들은 이렇게 물으며 그녀의 출신학교 언급을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O대표가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만 지으며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 중견그룹 총수 부인인 J여사는 노골적으로 유도성 질문을 던졌다. “이대 나오지 않았어? 채플 시간에 자주 본 얼굴인데? 자기 몇 학번이야?” J여사의 이대 후배들도 그날 이 말을 듣고 맞장구쳤다. “그래 맞아! 나하고 같이 프랑스현대철학 수강했잖아?” “연대 경영학과 남학생들과 소개팅도 함께 했지?” 그때 O대표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저는 야간 전수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했답니다.” J여사는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고 다른 후배들은 ‘전수학교’가 무슨 학교인지조차 몰랐다. 전수학교는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한 야간 고교인데, 졸업생이 고졸학력을 인정받으려면 따로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J여사와 ‘사모님’들의 모임인 ‘르네상스회’ 멤버들은 O대표가 해외유학파라고 추정했다. 1088년 설립된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볼로냐 대학교? 그 근거는 O대표와 그 대학교 교수인 움베르토 에코 박사가 함께 다정히 앉아 찍은 사진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당대 최고의 기호학자이자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쓴 소설가 아닌가. “에코 선생과 무슨 인연이야?” J여사가 O대표에게 물었더니 O대표는 “사제지간”이라고만 말하고 자세히는 밝히지 않았다. 세계적인 석학의 제자라 하니 르네상스 회원들은 일단 야코가 죽었다. 그러나 박사과정 제자인지, 석사과정을 다녔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몰라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O대표의 이런 신비주의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 O대표 스스로 한번도 말하지 않았는데도 ‘사모님 사교계’에서는 볼로냐대학 고전문학 박사, 움베르토 에코 수제자 등으로 알려졌다. J여사는 여고 또는 대학 동창회에 나가면 이렇게 자랑한다. “스카프 하나를 사더라도 볼로냐대학 박사인 O대표에게서 커피 대접 받으며 인문학 교양강좌 듣고 구입하면 일거양득이지.”
O대표가 전수학교에 다닐 때 음악 강사는 성악 전공 청년인 P씨였다. P씨는 이탈리아 유학 자금을 마련하느라 이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수업 방식은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작곡가의 오페라 아리아를 들려주는 것. 레코드를 틀거나 P씨 자신이 가볍게 흥얼거렸다. 대부분의 학생은 책상 위에 얼굴을 대고 잠을 잤다. 그러나 O학생은 오페라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탁월한 암기력으로 그 이탈리아어 가사를 외워나갔다. 학기가 끝날 즈음 P씨와 O학생은 ‘리골레토’와 ‘토스카’의 가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O양의 노래솜씨는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장애인 부모를 둔 소녀가장 O양은 서울시청 부근 지하상가의 액세서리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전수학교에 다녔다. 가게 주인이 인근 보석가게를 인수하면서 O양에게 ‘저녁 타임’ 일을 봐달라고 하기에 O양은 전수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O양은 가게에서 종일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렸는데 어느 날 서양인 손님이 와서 그 노래를 듣고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었다. O양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탈리아어로 대답했다. 오페라 가사 어느 부분이 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 며칠 후 EBS의 ‘주말의 명화’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La Strada)>이 방영되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그 영화를 우연히 본 O양은 야릇한 체험을 했다. 이탈리아어 대사가 귀에 들려왔다! 이 영화의 비디오를 구하여 수십 번 보았더니 대사가 통째 머리에 들어왔다. 그 후 가게를 찾는 이탈리아인 손님들과 이탈리아어로 대화하며 물건을 팔았다.
이탈리아의 어느 아마추어 여행가가 이 가게를 들렀다가 O양의 유창한 이탈리아어 솜씨를 칭찬하며 이 보석가게를 자신의 블로그 기행문에 소개했다. 그 후 한국을 찾는 이탈리아인들은 이 가게로 줄지어 몰려왔다. 그 여행가는 O양에게 움베르토 에코 작 <장미의 이름> 이탈리아 원어판을 선물로 주었다. 1327년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테마로 한 이 추리소설은 거대한 인문학 지식의 창고였다. 처음엔 너무 어려워 한 페이지를 읽는 데 1시간쯤 걸렸다. 이윤기 번역 한글판을 참조하며 읽는 데도 페이지가 얼른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지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10분이면 거뜬히 읽었다.
O양이 일하는 보석가게는 번창했고 가게 사장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보석박람회에 포상 출장을 겸해 O양을 데리고 갔다. 파리는 뼛속까지 빈궁했던 ‘전수학교 중퇴녀’에겐 너무도 황홀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에르메스, 루이 뷔통, 샤넬 등 럭셔리 브랜드의 대형 매장을 구경했고 부쉐롱 보석가게도 둘러보며 자신의 가슴에서 요동치는 야망의 울림을 느꼈다. 시내 곳곳엔 ‘키오스크’라는 신문가판 가게가 보였다. 세계 각국의 신문 수십 종이 팔리고 있었다. 어느 이탈리아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1면에 실린 움베르토 에코의 사진이 눈길을 끌어 그 신문을 사서 읽었다. 에코 교수가 파리 시내 ‘콜레주 드 프랑스’라는 곳에서 대중강연을 연다는 예고 기사였다. 1530년에 세워진 이 학술기관은 소르본대학과 더불어 수백 년 동안 학문의 전당 역할을 맡은 곳 아닌가.
<장미의 이름>을 쓴 저자를 만날 수 있다니! O양은 잠시 짬을 내 강연장을 찾아갔다. 고색창연한 건물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드디어 움베르토 에코의 얼굴을 보고 육성을 들었다. 강연 제목은 ‘유럽문화사에서의 완벽한 언어 탐구’였는데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었다. 질의 응답시간에 O양은 손을 들었으나 지명 받지 못했다. 공식 강연행사가 끝난 후 O양은 에코 선생에게 다가갔다. 이탈리아어로 인사말과 질문을 던졌는데 가슴이 벅차올라 문법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말했다.
“코레아에서 온 애독자입니다. <장미의 이름>을 한국어와 이탈리아어로 완독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 등 서양철학이 두루 무르녹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소설 글감을 학문에서 찾는 소설가인지요, 아니면 학문의 여기(餘技)로 소설을 쓰는 학자인지요?” O양의 당돌한 질문에 놀란 듯 에코는 잠시 눈이 동그래지더니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학자와 소설가, 모두 쉽지 않는 직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도전이지요.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은 학자의 시야를 넓혀주고, 학문의 심오성은 소설의 콘텐츠를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O양은 움베르토 에코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의 소설 작품을 샅샅이 읽었다. 이탈리아어판, 불어판, 영어판도 구해 탐독했다. 그 덕분에 O양은 여러 서양언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O양은 밀라노 디자인쇼를 참관하러 현지에 갔다가 움베르토 에코의 자택을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한글로 번역된 그의 저서들을 갖고 갔더니 그는 한글 모양이 매우 아름답다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한글의 음가(音價) 원리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명품 샵 M부티크를 개업한 O대표는 에코 교수와 e메일로 글을 주고받는 소수의 한국인이 되었다. O대표는 에코 교수가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시작할 때부터는 그를 ‘빠드레(아버지)’ 또는 ‘빠빠(아빠)’라고 불렀다. 산삼이 효험이 있을 것 같아 O대표는 2015년 봄에는 산삼을 사서 밀라노에 가기도 했다. 2016년 2월 19일 에코 교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 무렵 뉴욕에 출장 갔던 O대표는 서둘러 밀라노로 가서 조문했다. 석 달 지난 후인 2016년 5월에도 일부러 밀라노 출장 건을 만들어 에코 선생의 묘소를 찾아갔다.
O대표는 에코 교수가 바로 앞에 앉아 미소 짓는다고 여기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빠빠!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이란 책,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저는 화가 나더라도 크게 웃을게요.”
O대표가 밀라노에서 로마로 온 것은 전수학교 시절의 음악강사를 찾기 위해서다. 에코 스승을 저 세상으로 보냈으니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한 P씨를 찾아 스승으로 모셔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유비통신’을 들으니 그는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하고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다 어느 날 성악무대에서 홀연 사라졌단다. 로마 어느 곳에서 한국식당을 경영한다는 풍문을 들었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의 천재적 음악성이라면 당연히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서 활약해야 하는 것 아닐까?
미리 구한 로마 시내 한국식당 주소 리스트를 들춰보며 O대표는 순례에 나섰다. 몇 군데에서 허탕을 치고 호텔로 돌아갈까 하다가 눈앞에 ‘아리랑’이란 한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서 얼른 그곳에 들어갔더니 자그마한 실내에 손님이라고는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밖에 없었다. “아! 교수님을 여기에서 또 만났네요!” O대표는 낮에 우연히 ‘오드리 헵번’ 레스토랑에서 만난 K교수와 또 마주쳐 탄성을 질렀다. K교수도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나를 미행하지는 않았을 테고….” 낯선 여성들에게서 스토킹을 가끔 당하는 K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K교수는 로마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응급진료해준 코레아 아기 부모의 초대로 온 참이었다. 코레아 가족 옆에 앉았던 쉐프 P씨의 명함을 받고 이곳에서 식사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탈리아인 여성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O대표는 그녀에게 식당 사장에 대해 물었다. “혹시 이곳 사장님이 과거에 테너 성악가 아니었던가요?” “예? 저는 모르겠는데요.”
자그마한 레스토랑이다 보니 홀과 주방이 맞붙어 있어 주방 안에서도 귀를 쫑긋 세우면 손님들의 대화가 들릴 수도 있다. 쉐프 P씨의 귀에 얼핏 ‘과거에 테너’라는 말이 들렸다. 홀 쪽으로 눈길을 돌려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 살며시 살폈다. 한국인 여성 손님이 종업원과 얘기하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성악을 해서 남의 목소리에 대한 감각이 매우 예민한 P씨는 그 여성의 목소리를 아련한 옛적에 들은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장님이 산타체칠리아 나온 분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것 전혀 몰라요.” 대화를 듣던 P씨는 서울 남산 언저리에 있던 전수학교 풍경이 얼핏 떠올랐다. ‘나와 아리아 주고받으며 부르던 그 O양?’ P씨는 귀를 기울이다 그 O양의 목소리임을 확신했다.
잠시 후 홀 안에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주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P씨가 홀 쪽으로 나오더니 느닷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 뒤태를 얼핏 본 O대표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벌떡 일어나 쫓아나갔다. “잠깐만요!” O대표가 이렇게 외쳤지만 P씨는 저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O대표는 그 사나이가 스승 P씨인지 알 수 없었다. 궁둥이가 남산만큼 불쑥 솟아 다른 사람 같기도 하고…. ‘식당 주방장이 왜 저렇게 뛰어나갔을까? 나를 만나기 거북해서일까? 그럼 저 분이 진짜 P선생일까?’ O대표는 아리랑식당을 나와 로마 시내를 천천히 거닐었다. 머리 속엔 전수학교 시절에 부르던 노래가 맴돌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푸치니 <토스카> 가운데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라는 노래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비시 다르테/ 비시 다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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