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광천역에 내리면 역전 광장 한구석에 자전거를 세우고 기다리고 계셨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들이 고향집으로 내려올 때마다 아버지는 늘 마중을 나오셨다. 벌써 50년 전 일이지만 그는 지금도 광천역에 내리면 자기도 모르게 사방을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저만치 자전거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아서다.
한 시간 전부터 역에 나와 아들을 기다린 아버지는 그러나 집으로 가는 동안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막상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면 수줍어 말 못하는 총각처럼 오히려 무뚝뚝하게 아들의 짐만 자전거 짐칸에 싣고 앞장섰다. 그리고 아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에는 바리바리 짐 보따리를 자전거 뒤에 가득 싣고 한 시간 전부터 또 휭 하니 광천역으로 나가셨다.
‘낯선 서울에서 몸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세끼 밥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라. 넌 장남이니 우리 집의 기둥이다. 네가 잘되어야 네 동생들도 본받아 잘할 거 아니냐. 이 아버지는 너만 믿는다.’ 아마 아버지는 이런 말들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끝내 심중의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침묵으로도 얼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니 말이란 어차피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간곡하고 정성스러운 아버지의 기대와 다르게 아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여 열댓 군데의 직장을 떠돌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역전에 나와 이제는 장성한 아들을 기다리셨고, 안타깝고 답답했으련만 이렇다 할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셨다. 그냥 기다림이 전부였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기다릴 뿐 가타부타 참견을 하지 않았다.
아들 장사익은 40대 중반에 이르러 뒤늦게 소리꾼으로 데뷔했다. 열다섯에 상경하여 30년 만이었다. 그 이후 빠르게 정점을 향해 나아갈 때 아쉽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기나긴 기다림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오랜 기다림이 끝났으니 마음 놓고 훌훌 떠나신 걸까.
갈팡질팡하거나 느린 걸음일지라도 기다려주는 사람만 있다면 끝까지 갈 수 있다. 걸음마를 배울 때 엄마가 팔을 벌려 기다리면 넘어져도 불끈 일어났듯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격려는 변치 않는 기다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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