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깜깜한 밤이라도 가만히 눈을 감으면 세상이 환하게 보이는 건 으흥! 달에서 온 나. 엄동수 때문이래’(시 ‘만월’ 중에서)
이런 자신감이라니. 3학년 8반 엄동수 멋집니다. 호박잎 같은 웃음을 짓는 아빠 덕분이죠.
하지만 엄동수의 현실은 좀 달라요. 학교에선 “도대체 네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니”라는 말을 노상 듣는 아이입니다. 어느 학교든 3학년 교실에는 한 명쯤 있을법한 아이죠.
24편의 시에는 엄동수가 태어날 때 이야기, 친구들이 보는 모습, 여자친구, 공부, 시험, 싸움, 숙제, 똥 누기, 아빠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언뜻언뜻 바닥에 깔려 있어 애잔합니다.
읽다 보면 느리고 말 없고 엉뚱한 한 아이가 눈앞에 서 있습니다. 글자에 대한 실험도 재미있습니다. 행간의 넓이, 글자색의 농담, 글자의 높이, 문장의 기울기까지 함께 시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 아이 머릿속엔 무엇이 있을까요? 시인이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달팽이 따라, 누군가 뱉은 말의 꼬리를 잡고’ 말입니다. ‘갖바치 엄동수와 달팽이 왕국1’ ‘〃2’라는 두 편의 연작시팽이 판타지가 열립니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보고, 오래오래 생각해야 보이는 세계입니다.
책장을 앞뒤로 넘기며 토끼, 고양이, 달팽이, 오리, 달, 나비, 닭, 신발과 발 등이 가진 의미를 찾아보세요. 곳곳에 보이는 ‘달’의 의미를 찾을 때마다 엄동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을 동시 부흥의 시대라 합니다. 실험적이고 당당한 ‘이야기 동시’가 그에 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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