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지난주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71년 전 미국이 투하한 핵무기의 희생자를 추도했다. 앞서 일본으로 가는 길에는 베트남에 들렀다.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20세기의 가장 치열한 전쟁의 하나로 기록되는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41년째다. 15년간 필사적으로 상대를 섬멸하려 했던 두 적국은 이제 서로를 환대하며 협력의 파트너임을 세계에 다시금 공표했다. 원자폭탄이 터진 1945년의 여름까지 4년간 태평양전쟁에서 혈투를 벌인 미국과 일본이 지금 그러한 것처럼. 그러한 새로운 관계 구축 과정에서 과거사에 대한 회고나 사과 같은 것은 끼어들지 않았다. 오직 미래를 향한 현재의 과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 같은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일본 원폭을 계기로 해방된 나라이고 1960, 70년대에 미국을 도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나라다. 그 이전에는 누구보다도 베트남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바라보며 동정하는 나라였다. 언론이 활성화된 1920년부터 한국인들은 신문에서 베트남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예를 들면 동아일보 1920년 9월 6일자이다.
‘비참하고 지리하던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의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미국에서는 윌슨 대통령이 이를 제창하고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이에 응하였다. 세계의 압박받는 모든 민족은 분투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그리고 안남….’
안남(安南)이란 월남 혹은 베트남을 말한다. 세계의 열강은 아직 이들 어느 민족에도 해방과 자유를 주지 않고 강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일제 치하의 신문은 전한다.
‘프랑스 영토인 안남에서는 독립운동이 날로 맹렬하므로 프랑스 정부는 극력 진압하는 중이나 본국의 재정난으로 도저히 식민지 치안을 유지할 수 없어 안남을 미국에 팔까 상담을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런 소문에 뼛속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지배권을 넘겨받아 통치 중이던 미국이 베트남까지 접수할까 하는 소문은 실현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20여 년 후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대결한 일본에 점령되어 조선과 같은 해에 해방되었다.
‘월남(越南)은 오랜 기간 중국의 압박을 받고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는 중국의 속국인 월남의 외교권을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항의를 받기도 했으나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는 중국의 세력 약화를 틈타 월남을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각처에서 의병이 연이어 일어나 조국을 다시 찾고자 청년지사의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참담하였다.’(동아일보 1920년 9월 7일자)
1919년 초에 개막한 파리 강화회의에서 제창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베트남 민족은 독립운동을 일으키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들을 하였다고 신문은 전한다.
“자기 집에 불을 질러 가산을 전부 태우고, 독립이 되기 전에는 다시 집안에서 살지 말자.”
이 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1년이 지났는데 프랑스는 소요를 진압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 팔아넘기겠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때로부터 96년이 지난 최근에 한국 신문은 베트남과 일본을 연이어 방문한 미국 정상이 한국인 원폭 희생자의 위령비도 찾아갈까에 많은 관심을 표했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에도 베트남에도 사과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전쟁 중의 일에 대해 사과한 국가는 역사상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 역시 베트남전에서 행한 일에 대해 정식 사과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꺼낸 적 없다. 그렇다고 비난받은 적도 거의 없다.
이번 G7 회의의 주최국인 일본도, 베트남도 미국에 과거사와 관련한 사과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과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욱이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서로 다른 문명권의 세 나라는 공유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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