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폴, 얀은 15세기 초에 활약한 형제 화가입니다. 각자 이름보다 랭부르 형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슷한 화풍으로 공동 작업을 했거든요.
전염병으로 1416년 같은 해에 사망한 화가 3형제의 대표작은 ‘기도서’입니다. 기도 시간과 기도문이 열두 달 풍속 그림과 어우러진 작품의 주문자는 프랑스 후원자, 베리 공작이었어요. 과연 프랑스 왕족의 기도서답습니다. 화려한 12개 별자리 삽화가 포함된 작품은 무척 호사스러웠지요. 모로코산 붉은 가죽 표지에 206장의 속지는 모서리에 금박을 입힌 고급 양피지를 사용했어요.
작품 속 풍속 그림은 주문자의 신년 만찬으로 시작됩니다. 이후 4월은 혼인의 계절이었고, 5월은 나들이 철이었습니다. 체력 단련을 겸한 매 사냥이 8월 행사였지요. 즐거운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월 추위에 잠깐 숨을 고른 성 밖의 농민들은 고된 일상을 보냈습니다.
3월 밭을 일구고, 포도나무 손질을 마친 농부들은 6월에도 분주합니다. 풀베기 작업을 해야 했거든요. 그림 속 남성들은 긴 날 낫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풀베기 중입니다. 맨발의 여성들은 자른 풀을 긁어모으고 있군요. 그런데 농민의 복장이 여러 겹 옷감으로 부를 과시했던 그림 속 부유층과 사뭇 다릅니다. 남성들 의복은 속옷이 보일 정도로 간소하고, 여성들 행색도 수준이 비슷합니다. 6월 한 달 힘겹게 준비한 마른 풀은 겨울철 말 사료였습니다. 건초 준비가 끝난 7월 양털을 깎고, 9월과 10월 포도 수확과 씨앗 뿌리기를 했지요. 성 안 거주자들이 입고 먹을 것들이었어요. 좀 쉴 법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1월과 12월의 행사, 돼지 돌보기와 멧돼지 사냥이 남아 있었거든요.
이제 곧 6월입니다. 매섭게 춥지도, 숨 막히게 덥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력을 다해 달려온 만큼 또 질주해야 한다니 체력도, 정신력도 걱정입니다. 내 삶이 덜컹거릴 때만큼 남의 삶이 궁금할 때도 또 없습니다. 1년살이를 월 단위로 그린 기도서를 기웃거리다 6월에 유난히 관심이 쏠린 이유입니다. 한 해의 반환점인 6월이 혹한에 쓸 마른풀 준비기라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럼에도 버겁게 챙겨야 할 것이 주인 집 말 사료가 아니라 온전히 내 삶의 예상문제들이니 이 또한 감당할 만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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