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정조 18년) 3월, 황해도 강령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증인은 현장에 있었던 함조이.
“임성채의 처와 제가 앉아서 물고기를 썰고 있는데 객상 오흥부가 들어와서, 임성채의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화가 난 임성채의 처가 ‘석어(石魚)’를 던지며 ‘어찌 이 아이가 네 아이인가?’라고 다투는데 임성채가 들어와서 오흥부와 몸싸움을 했습니다.”(‘일성록’)
이 글의 석어는 ‘석수어(石首魚)’, 곧 조기다. 강령은 해주 인근 바닷가 마을이다. 지금도 인근 연평도에서 조기가 곧잘 잡힌다. 내용을 살펴보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다. 조기는 지금과 달리 흔하디흔한 생선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연평 바다에 석수어 우는 소리가 우레처럼 은은하게 한양까지 들리면, 모든 이들이 입맛을 다시며 석어를 생각한다’고 했다. 조기가 많이 잡혔고, 누구나 좋아했으며 또 널리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도 “법성진(법성포) 동대(東臺) 위에서 멀리 칠산도를 바라본다. 매번 석수어가 올라올 때가 되면 이를 잡으려는 배들이 바다 위에 늘어선다. 마치 파리 떼가 벽에 달라붙은 것과 같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유원은 분명히 잡아 올리는 조기는 많은데 조정에 올라오는 보고는 늘 ‘조기가 흉작’이라고 하고, 걷히는 세금도 적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탄한다(‘임하필기’).
조기는 고려시대에도 이미 흔한 생선이었다.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관리 민안인(1343∼1398)이 보낸 술과 말린 조기를 선물로 받고 “잔비늘의 물고기, 석수(조기)라 하는데, 말린 고기의 맛이 저절로 깊다”고 했다(‘목은시고’).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1431∼1492)은 “봄꽃 비단같이 아름다울 때 돌아와, 반드시 몽산(蒙山)의 석수어를 보리라”고 했다. 조선 초기에 이미 “매년 3, 4월(음력)이면 전국에서 상선이 몰려와 몽산포 부근에서 석수어를 잡아 말리는데 서봉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우리와 달리 조기를 널리 먹지 않았다. 고종 10년(1873년) 5월, ‘중국 배들의 서해 불법 어로작업’이 문제가 된다. 고종이 신하들에게 묻는다. “물고기는 어디서 잡히며 중국 배(唐船·당선)들은 어디서 작업을 하는가?” 신하들이 답한다. “청어는 장연, 풍천, 옹진 등 5곳에서 많이 나고 석어(조기)는 해주와 연평 바다에서 나는데 당선은 오로지 장연 등 5곳에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석어를 잡으러 연평에 오는 일은 없습니다.”(‘승정원일기’)
조기는 많이 잡혀 흔하니 가난한 선비들도 널리 먹었다. 실학자로 호남 순천에서 여생을 보낸 위백규는 1791년(정조 15년) 늦봄, 벗 12명과 전남 장흥 사자산으로 나들이를 떠난다. 이때 마련한 음식이 ‘존재집’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술(삼해주)과 안줏거리로 석수어를 구웠으며, 쌀밥과 청태(靑苔·김)를 싸들고 나란히 함께 산에 올랐다.’
조선 초기의 문신 남효온도 ‘추강집’에서 ‘(박연폭포를 보러 갔다) 길을 잃고 배가 고파 석수어를 먹고, 적멸암에 올라 무 뿌리를 먹었다’고 했다.
조기와 민어는 사촌쯤 되는 물고기로 둘 다 민어과의 생선이다. ‘정자통’ ‘해동역사’ 등에서 밝히는 민어, 조기 이름에 대한 유래는 비슷하다. 석수어는 ‘면어(면魚)’다. ‘면(면)’과 ‘민(民)’의 중국 발음이 비슷하니 민어라고 불렀다.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큰 것은 민어라 하고 작은 것은 조기라 한다고 했다. ‘민어(民魚)’의 ‘백성 민(民)’을 두고 “온 백성이 널리 먹었던 생선이어서 민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조기를 ‘助氣’라고 쓰고 “기운을 북돋워주는 생선”이라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다.
‘산림경제’에서는 ‘조기는 서해에서 나는데 입맛을 돋워주고 기운을 높인다. 말린 것은 몸속의 묵은 음식물을 내보낸다. 순채와 더불어 국을 끓이면 좋다’고 했다. 음식은 약이 아니다. 조기가 기운을 높여주듯이 다른 생선, 먹을거리도 마찬가지로 몸의 기운을 북돋운다. 잘 지은 밥이 몸의 기운을 북돋우지만 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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