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 ‘얄미운 X’…<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일 15시 14분


코멘트

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 ⑤

중견그룹 총수의 부인 J여사는 ‘사모님 사교계’에서 ‘얄미운 X’ 또는 ‘부러운 X’으로 알려졌다. 한때 유행하던 ‘얄미운 X’ 시리즈의 주인공처럼 J여사는 공부를 못했어도 명문학교를 나왔고, 아들·딸도 일류대학을 다닌다. 요란스럽게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몸매는 날씬하고, 보톡스 주사를 맞지 않아도 피부는 탱탱하며, ‘아리수’만으로 세수해도 얼굴엔 ‘물광(光)’이 번쩍인다.

J여사의 친정아버지는 미곡상, 주유소, 영화관, 버스회사 등 주로 현금을 받는 업종에서 떼돈을 벌었다. 어린 시절 J양은 아버지가 밤마다 농협 쌀자루에 담아온 현금뭉치를 엄마와 함께 100장씩 묶어 돈다발을 만드느라 졸음과 싸워야 했다. 은행 마감 이후 번 돈이 그 정도이니 은행에 예치한 뭉칫돈은 얼마나 많겠는가.

J양이 고액권 몇 장을 슬쩍 감추어도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학교 매점에서 꽈배기, 찰떡, 라면땅 등을 사서 친구들에게 마구 나눠주었다. 하교 후엔 제과점에 친구들을 무더기로 데려가서 팥빙수, 소보루빵 등을 실컷 사 먹이고 아버지 극장에서 영화도 공짜로 보여주었다. J양은 초중고교 내내 전교 학생회장을 지냈다.

‘콩나물값 깎지 마라!’
J양 아버지가 내세운 가훈(家訓)이다. 유치하다는 가족의 지적에 대해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하고 거래하는 모든 사람한테 이익을 줘야 하겄다, 이기(이것이) 내 철학이다! 콩나물값 깎아봐야 몇 푼 되겄노? 우리 종업원 월급봉투, 다른 회사보다 두어 배 두툼한기라. 그라이께 유능한 인재들이 우리 회사로 구름같이 몰려든다 앙이가? 사람들은 돈벌기가 에렙다(어렵다)하면서 애낄라꼬만(아끼려고만) 하는데 넘한테 이롭게 해봐라, 더 큰 돈이 자꾸 들어온다, 이기라(이것이라)!”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부르는 가격보다 10배나 비싸게 주고 산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례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했다. 국보에 대해 제대로 대접하자면 그 돈을 주어야 마땅했으리라. 그 일화가 알려지자 문화재 거간들은 좋은 물건이 나오면 간송에게 다투어 달려갔다고 한다. 아버지도 거래 상대방에게 항상 값을 후하게 치렀다. 아버지와 거래하려는 사업자들이 언제나 줄을 이었다. 소비자에겐 경쟁업자보다 한 푼이라도 싸게 팔았다.

J양이 고2 때 학교 성적이 밑바닥이어서 번듯한 대학에 가기 어렵다고 낙담하자 낙관주의자인 아버지는 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우리 이뿐 딸내미가 와 그리 울상이고? 이 아부지가 길을 찾아볼 낑게 찌푸린 얼굴 활짝 펴봐라!”
아버지는 S대 수석합격자를 J양의 가정교사로 모셔왔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 대학생 S군은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큼직하게 난 ‘유명인사’였다. S군은 J양의 수학 실력을 점검해보고 경악했다.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가 J양 수학세계의 전부였다. 2차방정식은커녕 인수분해도 언감생심이었다.
“그딴 복잡한 수학, 배워서 뭐해요?”
J양의 수학무용론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고교 때 이미 대학교재 ‘미적분학’을 흥미진진하게 독학했던 S군의 눈에 J양은 외계인으로 비쳤다. J양의 눈에도 S군이 ‘ET’처럼 보였다.

돌파구는 예체능계였다. 그러나 음악, 미술, 체육 어느 분야에도 별다른 재능이 없는 J양은 이 돌파구로도 나갈 수 없었다. J양의 어머니가 해결책을 찾아왔다.
“하프 배워볼래?”
음악대학에 하프 전공자를 1명 뽑는데 지원자가 거의 없어 원서만 내면 합격한단다. 하프는 값이 엄청 비싼데다 운반전용 차량까지 있어야 하기에 재력가 자녀가 아니면 엄두를 못 내는 악기다. J양은 부모의 재력, 정보력 덕분에 ‘학교 종이 땡땡땡…’ 정도 연주하는 실력만으로도 당당히 합격했다.

J양은 신입생 때 벚꽃 필 무렵 미팅에서 만난 S대 사회계열 남학생과 한때 달콤한 연애기간을 보내기도 했다. 키가 크고 눈썹이 짙은 그 미남형 청년과의 사랑은 여름쯤에 끝났다. 청년이 J양을 찼다. J양이 음대생이라고 청년은 쇤베르크, 슈톡하우젠 등 현대음악의 거장에 대해 자꾸 이야기했다. J양은 처음 들어본 이름이라 눈만 껌벅거렸다. 청년이 함석헌, 로자 룩셈부르크를 들먹이자 J양은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하품을 했다.

외모가 연예인급인 J양은 숱한 청년들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J양의 눈에는 ‘찌질남’일 뿐이었다. J양이 사귀고 싶어하는 ‘훈남’ 청년들은 반대로 그녀를 외면했다. 결혼적령기를 살짝 넘긴 J양의 고민을 해결해 준 구원 투수도 역시 아버지였다.
“S군 기억 나제? 니 가정교사했던 수재….”
“기억나다마다요. 그 똥자루….”
“똥자루? 그 무신 소리고?”
“김정일처럼 생겼잖아요. 몸통은 땅딸막하고 대가리는 큼직하고….”
“허허, 이 가시나가 말버릇이 와 그 모양이고? 길게 말할 거 없다. 니 신랑감이다!”

J양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했다. 아버지가 천거한 신랑 후보 S씨에 대한 장단점이 머리 속에 일목요연하게 그려졌다. 먼저 단점부터 떠올랐다. 무엇보다 못 생긴 용모가 싫었다. 어쩌면 김정일처럼 머리칼까지 곱슬머리일까. 쌍꺼풀 진 큼직한 눈은 두꺼비 눈 같아 마주치기조차 싫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도 켕겼다. 홀어머니마저 별세해 혈혈단신이란다. 하고 많은 직장 가운데 아버지 회사에 들어온 것도 거슬렸다. 장점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열거했다.

“부부끼리 살다 보모(보면) 외모는 안중에도 안 들어온데이. 니 눈에는 똥자루로 보인다카지만 내 눈에는 나폴레옹인데… 키는 작아도 영웅 앙이가? S서방은 머리도 천재지만 힘이 장사라! 김정일은 살퉁이지만 S서방은 근육덩어리야.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건 니도 짐작하겄지만 내 후계자로 키워볼라꼬….”
“후계자라뇨?”
“내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앙이고… 니가 무남독녀잉께 사우(사위)한테 구릅(그룹)을 맡겨야제. S서방을 오래 지켜보니 믿을 만한 사람잉기라. 부모도 안 계시니 데릴사우 아잉가베? 니도 샤베(시아버지), 쇼메(시어머니) 수투레스(스트레스) 없으이 더 좋은 거 앙이가?”

어머니도 아버지에게서 세뇌되었는지 맞장구쳤다. 부모는 S씨를 벌써부터 ‘S서방’이라 부르며 사위로 기정사실화하려 했다.
“2세를 생각해봐라. 남편감은 뭐니뭐니 해도 머리 좋은 사람이 최고인 거야. S서방은 S대학 수석합격자 아니냐? 우리 회사 장학금으로 미국 MIT에서 박사 학위도 받았고.”

J양은 2세와 관련해 ‘최선’ ‘최악’ 이 2개 단어가 떠올랐다. 최선은 아이들이 머리는 아빠, 외모는 엄마를 닮는 것이다. 최악은 그 반대…. 그러니 절체절명의 용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모 아니면 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J양은 고심 끝에 부모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S씨와의 권력관계를 미리 설정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정교사 남편-제자 아내’ 부부들은 대체로 아내가 평생 짓눌려 산다는 사례를 익히 알기 때문이다. 남편의 뇌리엔 늘 ‘돌대가리 제자’가 자리 잡고 있잖겠는가.

결혼식을 앞두고 뜻밖에도 S씨가 먼저 협상 카드를 꺼냈다.
“민망한 부탁이지만… 결혼식장에서 딱 하나만 부탁할게. 이것만 들어주면 평생 당신에게 순종할게.”
남편이 아내에게 ‘순종’하다니? J양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무슨 부탁?”
“음… 자기는 플랫 슈즈, 나는 키높이 구두를 신는 것….”
‘똥자루’ S씨는 ‘쭉쭉 빵빵’ J양이 하이힐을 신을 상황이 두려웠다. J양으로서는 묘한 일이었다. 그 제의를 받기 전에 그렇잖아도 그런 모양새를 구상했다. 신부보다 키가 작은 신랑과 웨딩마치를 한다는 것이 자기로서도 ‘쪽팔렸기’ 때문이다.
“좋아요.”
신랑과 대등한 권력관계를 요구할 참이었는데 신랑이 먼저 백기 투항하는 바람에 주종(主從)관계를 간단히 확보했다.

세월이 흘러 S씨는 장인의 회사를 물려받아 탄탄한 중견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업종도 IT, 화학 등으로 다각화했다. 자녀들은 J여사가 거둔 최대의 도박 성공사례였다. 두뇌는 아빠 닮아 IQ 160~170, 얼굴과 몸매는 엄마 닮아 연예인급이다. 아들은 과외 한 번 받지 않고도 D외고를 최상위급으로 졸업하고 S대 수시전형에 합격했다. 그러니 J여사가 사교계에서 ‘얄미운 X’이란 질시를 한 몸에 받지 않겠는가.
J여사는 중년에 접어들었어도 여전히 ‘쭉쭉 빵빵’이다. 여성연기인이자 모델인 차혜련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청담동 미용실에서는 별명이 ‘차혜련 언니’이다.

M부티크 O대표가 2015년 2월 초 J여사에게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라는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했다. 배재철이라는 테너 성악가의 굴곡 많은 삶을 영화화한 것이란다. 유럽 무대를 휩쓸던 ‘차세대 파바로티’가 갑상선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 목소리를 잃었다는데….
“영화에서 부인역으로 나오는 차혜련이 여사님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답니다.”
“그래? 그렇잖아도 그 영화를 본 몇몇 사람이 내게 그 말을 하더라구.”
“남자 주연 유지태… 정말 멋지더군요. 내면 연기, 외모, 노래 솜씨… 모두가! 스토리, 음악, 영상미학 등 모든 면에서 대단한 명화예요.”
“유지태?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데….”

며칠 후 설 연휴 때 J여사는 남편 S회장에게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다. 남편은 운전기사도 없는데 뭘 타고 영화관에 가느냐는 둥 가지 않을 구실을 찾는 눈치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며 남편에게 말한다.
“순종!”
이 한 마디만 하면 남편은 피식 웃으며 꼬리를 내린다. 그날도 S회장은 즉각 승용차 운전대를 손수 잡았다. 영화관은 이수역 부근의 어느 빌딩 꼭대기층에 있었다. 자그마한 독립영화관이었다.

‘100년에 한 번 나올 목소리’라는 찬사를 들은 테너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시련이 닥친다. 수술 끝에 목소리와 오른쪽 폐 기능을 잃은 것. 방황하던 그에게 일본인 음악기획자가 나타나 재활 수술을 권한다. 성공가능성이 매우 낮은 수술을 일본인 노(老)의사가 성공시킨다. 목소리를 겨우 되찾은 주인공은 화려한 기교는 없어도 삶을 관조하는 자세로 재기의 무대에 선다. 잔잔한 성조로 부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과연 명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여배우 차혜련에 빙의되어 영화 속으로 자기 몸이 빨려든 것 같았다. 주인공역인 유지태의 짙은 눈썹과 훤칠한 몸에서 얼핏 대학생 시절 잠시 사귀었던 S대 사회계열 남학생의 인상이 어른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남편에게 감상을 물었다.
“여배우가 당신 닮았더군.”
남편은 건조하게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J여사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본 남편은 ‘웬 과잉반응이냐?’는 투로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그녀는 이 명화가 왜 흥행에 실패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 관객의 수준이 한심하다, 스크린 배정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둥 말을 이었다.

J여사는 집으로 와서 차례상에 올렸던 전, 밤, 대추 등 안주 거리를 놓고 남편과 마주 앉아 와인을 마셨다. 오디오에서 푸치니 작곡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크게 틀어 감상하며…. 아까 영화에서 주인공이 부른 노래다.

“여보, 영화 만든 김상만 감독과 주연배우 유지태 씨, 차혜련 씨… 언제 한번 저녁 식사 초대하면 어때요?”
“뭐라고?”
S회장은 J여사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체했다. 영화인들과 얼굴을 마주 한다는 게 도무지 어색해서….
“기업인들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는…메세나? 당신도 메세나 활동을 좀 해봐요!”
“공돌이 출신인 내가 무슨 그런 활동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J여사는 일밖에 모르는 남편의 이런 면이 좋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언젠가 <미녀와 야수>라는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더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한사코 발뺌했다.
“영화 제목이 너무 노골적 아냐?”
S회장이 그렇게 말한 것은 ‘미녀= J여사’ ‘야수= S회장’이라는 등식을 염두에 두고 한 언급이리라. J여사는 그런 남편을 윽박지르는 게 악취미인 듯하여 그 영화 관람은 그만두었다. 그러나 유지태, 차혜련 초청 건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순종!”
J여사는 남편 눈을 응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S회장은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J여사는 연예계 사정에도 밝은 M부티크 O대표에게 저녁 만남 주선을 부탁할 참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성사되지 않았다. 남편이 해외출장을 간다느니, 주주총회 준비를 한다느니 하며 요리조리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J여사가 남편이 기피하는 이유를 파악한 것은 남편이 메모지에 낙서한 글씨 때문이었다. 거기엔 ‘유지태 188’이라 쓰여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모델로도 활동하는 유지태의 신장이 188cm였다. 남편은 키 차이가 20cm가 넘는 유지태와 함께 서기 싫었기 때문 아닐까. 그런 남편의 심경을 간파한 J여사는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남편의 기를 꺾어 좋을 일이 뭐 있겠는가, 하는 양처(良妻) 본성이 발동한 것이다.

S회장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집으로 배달된 신문 5종을 훑어본 다음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종이신문을 펼쳐 읽어야 뉴스의 경중(輕重)을 판단할 수 있고 세상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2016년 5월 16일 새벽에도 평소처럼 혼자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던 S회장은 동아일보에 전면(全面) 인터뷰로 보도된 성악가 배재철 기사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신문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쿨쿨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 들이대며 깨웠다.
“여보! 당신이 존경하는 배재철 테너 인터뷰가 나왔네! 우리 배재철 테너 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했지?”

“예? 배재철이 아니라 유지태, 차혜련 아녜요?”
“영화배우보다 오리지널인 배재철 테너를 만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마침 이 인터뷰를 진행한 박용 경제부 차장도 내가 아는 분이네. 부부 모두 음악애호가이지. 그분께 부탁해서 배 테너 부부와 저녁 자리를 마련할게요.”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