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서를 찾아야 해요. 정교한 추리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탐정이 됐다고 생각해야 해요.”
1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킹콩이스케이프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방들이 보였다. 6.6m²(약 2평) 남짓한 독특한 공간에 2∼5명이 들어갔다. ‘1시간 내에 탈출하라’는 특명과 함께…. 이들은 방에 있는 단서들을 수집하고 놓여 있는 각종 물건을 이용해 방에서 탈출하려 했다.
이곳은 요즘 젊은층에게 인기 있는 ‘탈출 카페’다. 스스로 탐정이 돼 탈출 과정을 즐기는 공간이다. 서울 강남과 홍익대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약 150개가 최근 1년 사이에 생겼다. 탈출뿐 아니라 살인사건이 일어난 방에서 경찰이 오기 전까지 사건을 해결하고 누명 벗기, 외부에서 문이 잠긴 시신 해부실 등 다양한 설정의 방이 있다. 기자가 실제 해보니 탈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조가 복잡한 자물쇠에, 탈출에 필요한 특정 도구나 장치를 찾아내는 과정도 어려웠다.》
‘탐정’에 빠져든 대중문화
하지만 이 어려움 자체가 바로 재미다. 대학생 공준웅 씨(26)는 “추리력을 발휘해 방을 탈출하는 순간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탈출 카페’뿐만이 아니다. 현재 국내 주요 문화 콘텐츠의 키워드로 추리와 탐정이 인기다.
극장에는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 상영 중이다. 지난해 9월 개봉된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은 관객 300여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김명민과 오달수가 코믹 연기를 벌이는 영화 ‘조선명탐정’ 시리즈도 인기를 끌었다. TV를 켜면 탐정이 나온다. ‘뱀파이어 탐정’(OCN)은 죽지 않는 흡혈귀가 된 사립탐정 윤산(이준)이 사건을 풀어가는 설정을 담고 있다.
그동안 공포, 판타지, 공상과학(SF) 작품을 써온 미국 인기 소설가 스티븐 킹(69)도 최근 탐정물에 도전했다. 그의 첫 탐정소설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지난해 국내에 출간돼 3만 부 이상 팔렸다. 서점에서 만난 회사원 최재혁 씨(43)는 “탐정소설은 집요하게 파고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 경찰과는 맛이 다르다. 오직 두뇌로만 해결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했다.
서점가도 마찬가지. ‘셜록 홈즈 실크하우스의 비밀’ ‘홈즈가 보낸 편지’ ‘주석 달린 셜록 홈즈’ 등 국내외 작가들이 쓴 홈스 관련 에세이와 소설 수십 권이 나와 있다.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 괴도 아르센 뤼팽, 추리소설 원조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전집 애장판 세트도 호응이 높다. 탐정 분야를 다룬 이론서 ‘위대한 탐정소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블러디 머더’도 나왔다.
최근 다시 ‘탐정’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을 제작한 크리픽처스 정종훈 대표는 “경찰, 검찰과 달리 공권력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탐정은 캐릭터만 제대로 구축되면 많은 스토리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크리픽처스는 내년 9월 개봉을 목표로 ‘탐정2’를 제작하고 있다.
가상 속 탐정을 꿈꾸는 사람들
현실에서도 탐정놀이에 빠진 사람이 적지 않다. 온·오프라인의 ‘추리·탐정 동아리’가 인기다. 올해 2월 서울 강서구 화곡역 앞에는 추리 마니아 30여 명이 모였다. 인터넷 커뮤니티 ‘RS추리동호회’ 회원인 이들은 이날 ‘숨겨진 폭탄을 찾아내라’는 미션을 수행했다.
우선 동호회 스태프가 화곡역 일대 골목마다 각종 문제와 단서를 뿌렸다. 단서에는 뜻 모를 글자가 하나씩 적혀 있다. 골목 곳곳에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설치됐다. 카메라가 폐쇄회로(CC)TV인 셈이다. 나머지 회원은 CCTV에 찍히지 않게 움직이는 동시에 문제를 풀어가며 일대 골목에서 놓인 4개의 단서를 찾았다. 이 동호회원인 대학생 문종원 씨(22)는 “소설 속 탐정처럼 문제를 해결할 때 성취감이 크다”고 말했다.
포털 사이트에는 이 같은 탐정 동호회가 수십 개나 된다. 각 커뮤니티 회원들은 납치, 살인, 도난, 분실 사건을 다룬 추리 퀴즈를 서로 만들고 풀며 암호 분석법, 독극물과 무기에 관한 지식을 공유한다. 회사원 최지훈 씨(40)는 “추리력을 바탕으로 인터넷 사기 피해 정보 공유 사이트에서 직접 사기 사건을 해결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왜 탐정에 빠져드나?
그동안 국내 문화 콘텐츠에는 탐정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적었다. 현실에서 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서는 사설탐정이 합법적인 직업이 아니다. 탐정 업무는 불법 흥신소가 도맡는다. 현실처럼 범죄, 스릴러물의 주인공도 형사나 경찰, 검사, 변호사, 기자였다.
하지만 3, 4년 전부터 탐정이 부각되고 있다. 그 원인은 △영국 드라마 ‘셜록’이 큰 인기를 끈 점 △추리소설을 보고 자란 세대가 문화 생산, 소비 주체가 된 점 △탐정 캐릭터가 형사보다는 탈권위주의 시대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출판사 황금가지 김준혁 주간은 “상당수 남성은 어린 시절에 본 추리소설 때문에 탐정에 대한 로망을 갖는다. 여자들도 형사 캐릭터와 달리 무언가 시크하면서도 세련된 탐정에게 매력을 느낀다”며 “해외 수사물에서는 형사보다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탐정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극대화한 콘텐츠는 영국 BBC 드라마 ‘셜록’(2010년∼현재)이다.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홈스는 ‘초시크남’(매우 쿨하고 멋진 남자)이란 별명과 함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입체적 캐릭터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왔다. 국내서도 셜록 열풍이 불며 2014년 KBS가 ‘셜록 시즌3’를 미국보다 빨리 수입해 방영하기도 했다.
문화 생산, 소비의 주축이 된 1970, 80년대 출생의 30, 40대가 탐정 콘텐츠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시에는 빨간색 표지에두께가 얇은 ‘셜록 홈즈 문고판’을 비롯해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ABC살인사건’ 등 ‘팬더추리걸작시리즈’ 같은 탐정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붉은 머리, 주근깨에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소년 ‘잭 P 매거크’가 마을의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하는 소설 ‘매거크 소년 탐정단’은 초등생들의 필독서였다.
회사원 김성훈 씨(42)는 “게임, 인터넷이 없던 때에 만화와 탐정소설이 오락거리였다. 친구들과 탐정단을 조직해 ‘강아지를 찾아줍니다’란 전단지를 붙이는 아이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장르 소설 출판사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는 “출판사 주요 편집자들도 탐정소설을 보며 자란 세대라 관련 외국 책들을 적극 수입하고 있다”고 했다.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발전하며 영상물의 화려한 볼거리에 둔감해진 대중이 갈수록 이야기의 힘을 중시하면서 탐정물이 각광받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추리가 ‘뇌가 섹시해야 한다’는 요즘 코드에 맞는다는 것이다. TV에서 어려운 문제를 푸는 ‘문제적 남자’ ‘더 지니어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험악한 현실, 일상에서 ‘탐정’을 찾다
현실의 이슈가 ‘탐정’ 붐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2014년 정부는 육성해야 할 신직업군 40여 개 중 하나로 사립탐정 탐정업(민간조사)을 포함시켰다. 국내서는 신용보호법에 따라 탐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신용정보회사가 아닌 곳에서 특정인의 소재 및 연락처, 사생활 등을 조사하는 행위 역시 불법이다. 하지만 정부가 신직업 육성 추진 직종으로 탐정을 선정해 추후 관련 법제화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현실에서 직업으로의 탐정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하금석 대한민간조사협회장은 “민간자격증인 ‘민간조사사’ 면허를 따겠다고 문의하는 사람이 최근 늘었다. 협회에서도 100∼200명이 교육 중”이라고 말했다.
사회가 흉흉해진 점도 탐정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탐정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에서는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보고 거짓말 여부를 가리는 방법 등을 배우는 탐정 수업이 토요일마다 열리고 있다. 경기대 대학원은 지난해부터 국내 최초로 사립탐정(민간조사전문가) 최고위과정을 개설했다. 현재 재학생이 40명 정도다.
담당인 손상철 경기대 교수는 “최근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에서 보듯이 사회가 흉흉한데, 사고나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는 인지력 관찰력 추리력 같은 탐정의 능력을 동경하는 사람이 늘면서 탐정 열풍이 불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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