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리워지는 여름이면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들이켜다’와 ‘들이키다’다.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 생각만 해도 더위와 갈증이 싹 가신다. 허나 이 두 낱말, 글꼴도 비슷하고 ‘과거형’이 ‘들이켰다’로 똑같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처럼 ‘들이켜다’만 인정한다. ‘들이키다’는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발을 들이키고 섰다’처럼 ‘안쪽으로 약간 옮기다’의 의미다. 사실 잘 쓰지 않으니 사어(死語)나 마찬가지다. 반면 북한은 물이나 술에 대해서는 ‘들이키다’를 ‘들이켜다’와 같은 의미로 쓴다. ‘들이마시다’ ‘들여마시다’도 마찬가지. 우리는 ‘들이마시다’만을 표준어로 삼고 있지만 북한은 둘 다 쓴다.
물의 세계에도 재미난 표현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슬픈 눈칫밥이 있듯,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물이 있다. 헛물이다. 그래서 보람 없이 애만 쓰는 일을 ‘헛물켠다’고 한다. ‘자리끼’는 잠잘 때 머리맡에 두는 물이다. 자리끼도 사람과 함께 잠든다고 생각해서일까, 밤을 지낸 자리끼는 ‘밤잔물’ ‘밤잔숭늉’이라고 한다.
맛도 모르고 마구 들이켜는 물이나 논에 물을 댈 때 딴 데로 새는 물은 ‘벌물’이다. 소리가 같은 ‘벌(罰)물’은 고문을 할 때 강제로 먹이는 물이다. 간장을 뜨기 전에 장물이 줄어드는 만큼 새로 채우는 소금물은 ‘제깃물’이라 한다. 마중물은 펌프질을 할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한 바가지쯤의 물을 이르는데, 팍팍한 삶의 윤활유라고나 할까.
나비물처럼 예쁜 이름도 있다. 세숫대야 같은 데에 물을 담아 가로로 쫙 퍼지게 끼얹는 물이 나비물이다. 더운 여름날 마당에 시원하게 물 뿌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때 튀는 크고 작은 물방울을 물찌똥이라고 한다. 방울꽃은 물방울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다.
더러워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물도 있다. 구정물은 무엇을 씻거나 빨아서 더러워진 물, 쇠지랑물은 외양간에 고인 쇠오줌이 썩은 물이다. 지지랑물은 비 온 뒤 썩은 초가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낙숫물이다.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이번 국회가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해주면 좋으련만. 헛물을 켠 게 한두 번이 아니니 이번에도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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