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성분 그림’ 집에 오래 걸어 놓아도 괜찮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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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위작품 논란’ 계기로 본 납함유 유채물감

지난해 12월 K옥션에서 이우환 씨의 1978년 작품으로 등록돼 낙찰된 위작 의혹 그림. 경찰은 “진품에서 안료의 납 성분이 훨씬 많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지난해 12월 K옥션에서 이우환 씨의 1978년 작품으로 등록돼 낙찰된 위작 의혹 그림. 경찰은 “진품에서 안료의 납 성분이 훨씬 많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지난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우환 씨 그림의 위작이라 알려진 압수품 13점을 진품 6점과 비교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며 “진품에 쓴 안료에서 납 성분이 위조 의심작보다 2배 이상 많이 검출된 것이 특히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경찰이 조사한 작품은 모두 1977∼1979년에 제작한 것으로 표기됐다. 1970년대까지는 납을 주재료로 만든 물감이 유채화에 흔히 쓰였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어린이 발달장애 등 물감과 페인트 속 납 성분의 유해성을 지적해 사용을 제한한 것이 그 무렵이다.

경찰은 상세한 데이터 공개를 거절했지만 시간에 따른 변색 양상이 뚜렷하다면 납 성분을 상당량 함유한 안료를 쓴 그림으로 봐야 한다. 김주삼 아트C&R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 소장은 “납을 주재료로 한 ‘레드(lead·납) 화이트’ 유채 물감은 건조가 빠르고 피막이 견고해 금속성 질감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지만 독성을 갖고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둡게 변색된다”고 말했다.

유해성이 알려진 뒤 레드 화이트와 비슷한 질감을 내고 독성이 적은 ‘티타늄 화이트’가 보급됐다. 그러나 미묘한 색감과 보존성 차이를 이유로 여전히 레드 화이트를 찾아 쓰는 작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화가가 팔레트에 개어 쓰는 유채 물감이 ‘납 중독 위협’에서 벗어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납 성분이 함유된 실내 페인트의 유해성이 부각되면서 납을 주재료로 만든 흰색 유채 물감 사용도 줄어들었다. 동아일보DB
화가가 팔레트에 개어 쓰는 유채 물감이 ‘납 중독 위협’에서 벗어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납 성분이 함유된 실내 페인트의 유해성이 부각되면서 납을 주재료로 만든 흰색 유채 물감 사용도 줄어들었다. 동아일보DB
유채 물감으로 주로 작업한 화가가 납 중독에 시달린 사례는 허다하다. 미술사가들은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 그려 넣은, 쭈그려 앉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납 중독 증상을 암시한다고 지적한다. 작업대에 드러누운 채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며 얼굴로 떨어지는 물감을 그대로 받아낸 미켈란젤로가 복통, 관절통 등 납 중독 증세를 호소했다는 것.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 그려 넣은 불편한 자세의 미켈란젤로 초상(위 사진). 미켈란젤로는 카라바조(가운데 사진), 고야(아래 사진)와 더불어 확연한 납 중독 증상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DB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 그려 넣은 불편한 자세의 미켈란젤로 초상(위 사진). 미켈란젤로는 카라바조(가운데 사진), 고야(아래 사진)와 더불어 확연한 납 중독 증상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DB
정신착란 증상을 보인 고야와 카라바조 역시 납 성분을 쓴 물감을 즐겨 사용했다. 카라바조의 유골을 분석 중인 이탈리아 피사대 인류학 팀은 “작가가 보인 걷잡을 수 없는 광기의 가장 큰 원인이 납 중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2013년에는 스페인 내과의사 훌리오 몬테스 산티아고가 “빈센트 반 고흐 역시 납 중독 증세를 보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고흐는 말년에 물감을 먹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1889년)의 오묘한 원형 빛무리가 납 중독으로 인한 시각장애의 흔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림에 쓰인 납 성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원종욱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유채 물감 속 납 성분에 대한 연구 사례는 기억나지 않지만 미국과 러시아에서 납 성분을 함유한 실내용 페인트의 유해성이 사회적 이슈가 된 사례와 비교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말라붙은 페인트에서 떨어져 나온 가루를 장기간 호흡기로 흡수한 어린이의 학습능력과 심폐기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진 뒤 납 성분을 쓴 안료와 페인트의 유해성 논란은 해외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소화기보다는 호흡기를 통해 흡수된 납 성분이 인체에 독으로 작용하며 복통, 신경마비, 신장장애 등의 증상을 일으킨다. 원 교수는 “납 성분을 함유한 안료로 그린 벽화에 오래 접촉한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례는 있다. 작업실과 전시실에서 안료의 성분이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대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납성분 그림#이우환 위작품#납함유 유채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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