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 대 1이라는 숫자(영화 ‘아가씨’의 하녀 숙희 역 공개 오디션 경쟁률)가 저를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 같아요. 실은 저 그냥 ‘운발’ 인생이거든요.”
순제작비 120억 원짜리 영화, 그것도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데뷔하고 칸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은 신인 배우의 과한 겸손인가 싶었다. 하지만 배우 김태리(26)의 ‘운발’론은 꽤 근거가 탄탄했다.
“어른들이 말리는데도 실업계 고교로 진학했고, 고교 때 전공(그래픽디자인)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대학(경희대 신문방송학과)에 가놓고는 불쑥 연극이 좋다며 배우가 되겠다고 했죠. 이기적이라 할 만큼 제 생각대로 저지르는 편인데 늘 운이 좋았어요.”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키우기 시작한 배우의 꿈은 2011년 극단 이루 입단으로 이어졌다. “대학 때 연극이 너무 좋다 보니 주변의 모든 사물이 연극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더라고요. 평생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처음 극단 스태프로 일할 땐 한 달 교통비를 겨우 벌며 다녔는데 원래 돈은 없으면 생기겠지, 하는 편이라….”
어찌 보면 태평하고, 어찌 보면 담이 큰 성격은 ‘아가씨’ 오디션과 촬영 현장에서도 도움이 됐다. “태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성격이 아니다”라는 박 감독의 평가를 전하자 그는 씩 웃었다. “‘왜요?’라고 묻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물었을 때 얻는 답이 제게 도움이 되잖아요. 현장에서 감독님은 제게 어려운 분이 아니셨어요. 이것저것 만들어 나가는 재미가 있었어요.”
“처음엔 제가 할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숙희 역은 그렇게 ‘김태리화’했다. 그는 “아가씨 히데코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갇혀 있고, 히데코의 숙부나 사기꾼 백작은 쾌락과 돈을 위해 움직인다. 숙희는 그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허술한 아이라서 좋았다”고 했다.
영화 속 숙희가 등장하는 장면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눈을 빛내는 그는 아직 숙희 역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영화 촬영 전 워크숍에서 일본 영화 ‘방랑기’를 봤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정말 흥미로웠어요. 애환이 있으면서도 익살맞고…. 어젯밤에 또 ‘나는 언제쯤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며 그 영화 생각이 나더라고요. 다채로운 인간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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