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바둑’이었다. 그의 단단한 행마와 견실한 수읽기는 기분에 치우치는 일이 많은 아마추어에겐 정말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한세예스24홀딩스 김동녕 회장(71)은 한 수 한 수 충분히 시간을 써 가며 신중히 판을 이끌었다. 그는 중반 무렵 혼잣말로 ‘약한 돌이 자꾸 생긴다’며 걱정했다. 제3자가 볼 때 ‘너무 몸 사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약한 돌을 보강했다. 하지만 형세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종반 초입에 착각으로 ‘비세(非勢)’에 빠지자 주저 없이 돌을 던졌다. 진땀나는 승리였다.》
●나의 한수○
꾹꾹 참아둔다
바둑 관전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다. 형세나 기분에 휘말리지 않고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 참는 것이다. 남들이 ‘느리다’고 비판하는 것을 감수할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경영에서도 회사 역량에 맞게 참아야 할 땐 참아두는 것이 실패의 확률을 줄일 수 있다.
○ 지지 않는 바둑을 둔다
홀딩스의 주력 회사인 의류업체 한세실업은 나이키, 갭, 자라 등 유명 브랜드에 의류를 납품해 지난해 3억4900만 장의 옷을 팔았다. 그의 기풍은 그의 경영과 닮았다. 홀딩스 자회사인 한세실업과 예스24 등의 지난해 매출이 2조 원을 넘었지만 사옥이 없다. 그의 사무실은 소파도 없이 6인용 회의 탁자뿐이다. 회사 설립 이후 적자를 낸 적이 없고 무차입 경영에 부동산보다 현금을 선호한다.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 수보단 내실을 중시한 것.
“제가 사업이 한 번 부도난 뒤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사업의 성패를 바둑의 승패에 비유한다면 이기려고 하는 바둑보다 지지 않는 바둑, 버티는 바둑을 두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게 더 승률이 좋을 겁니다.”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거친 그는 귀국 후 학계로 가지 않고 1972년 무역회사인 한세통상을 세웠다. 한때 수출 100만 달러 목전까지 가며 잘나갔지만 1978년 오일쇼크로 문을 닫아야 했다.
1982년 한세실업을 세워 재기한 그는 ‘한 걸음 늦게 가자’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경쟁자보다 늦게 가자는 건 아니고, 내 실력, 내 역량보다 살짝 천천히 가자는 겁니다. 그게 평상시에는 느려 보이지만 위기나 기회를 맞으면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 미리 수읽기를 해야 기회를 잡는다
또 다른 전기는 2003년 인터넷 서점인 ‘예스24’를 인수한 것. 의류업체와는 전혀 동떨어진 분야다. 그는 추가로 인수한 동아출판과 함께 유통과 콘텐츠 생산을 아우르는 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바둑도 어떤 대목은 수읽기를 미리 해 놔야 형세에 맞게 국면을 운영하기 쉽잖아요. 2000년대 초반 회사 내 현금이 풍부했는데 어디다 쓸지 고민했죠. 당시 전자상거래와 출판사 등 콘텐츠 산업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 두었는데, 마침 인터넷 서점 1위인 예스24가 매물로 나와 전격 인수했죠.”
기회가 와도 미리 수읽기가 돼 있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한세실업 확장 과정에서도 2000년대 초 미국과 베트남 간 관세 정상화를 미리 내다보고 적절한 시기에 선제 투자한 것이 적중했다. 베트남은 현재 한세실업의 가장 큰 해외 생산기지다.
○ 기재는 없어도 즐긴다
중고교 동창이자 서울대 법대 출신인 홍종현 9단이 ‘절친’이다. “홍 9단은 ‘동기 중에선 저를 제일 많이 가르쳤는데 실력이 가장 떨어진다’며 기재가 없다고 타박합니다. 하하. 요즘은 직접 두는 것보다 고수들의 바둑을 ‘눈팅’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스스로는 참고 두터움을 중시하는 바둑을 두지만 ‘눈팅’ 바둑은 화려하고 스릴 넘치는 유창혁 이세돌 9단의 바둑을 좋아한다. 그는 한세실업 대학동문전과 예스24 고교동문전 등 아마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재미도 있고, 나이 들어서도 즐길 수 있는 바둑에 대한 보답이기도 합니다. 근데 기자님, 왜 이세돌 9단이 기사회를 탈퇴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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