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에 갔다가 천문동(天門冬)이 숲속에 있는 것을 보고 마당에 옮겨 심었다. 덩굴이 길게 뻗어 우뚝하게 자라니 아름다워 볼만하였다. 보는 사람마다 대단하다고 칭찬하기에 내가 말했다.
“사람도 때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 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무가 처음 저 들판의 무성한 풀숲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내 마당으로 오니까 그것이 이렇게 좋다는 걸 알아주게 된 것입니다. 무릇 풀이란 무심한 존재이니 어찌 일부러 꾸미려고 마음을 먹어서 전후가 달라졌겠습니까. 단지 사람이 스스로 다르게 볼 뿐이지요(特人自改觀耳).”
창 너머 담장에 앵두나무가 저절로 자라고 있었는데 내가 매번 늙은 가지를 잘라주곤 했다. 앵두나무의 성질은 가지가 늙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해마다 열매가 많이 열리자 사람들이 볼 때마다 칭찬하였다.
“특별한 품종의 앵두나무로군요.” 내가 말했다. “이 앵두나무는 평범한 품종입니다. 그런데 저를 만나고 이렇게 칭찬을 듣는군요. 사물 또한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나 봅니다(物亦有遇也哉).”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 선생이 시골에 살면서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사람들의 삶과 관련시켜 깨달은 내용을 쓴 것이 ‘관물편(觀物篇)’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천문동이나 앵두가 저토록 특별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그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적절하게 이끌어준 덕분에 가능했다는 말씀. “그냥 받아들여. 우리 땐 다 그랬어. 아픈 게 청춘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가능성을 찾아주고 격려하며 이끌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멘토가 아닐까요. 물론 요즘처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는 세상에는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내가 과일나무를 심으면서 군자가 세상에 나가기 어려운 이유를 깨달았다. 나무의 묘목은 심어주어야 살고 자라는 것도 매우 더디지만 잡초는 심지 않아도 나며 자라는 속도도 매우 빠르다. 그래서 묘목이 자라려고 해도 온갖 잡초가 덮어버리니 이 때문에 묘목은 사라지고 만다… 처음 생겨날 때는 묘목이 잡초와 뒤섞여 구별하기가 어렵다. 세상에서 잡초를 훌륭한 묘목이라고 여기는 자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其始生, 苗與草混, 難以識別. 蓋世之以草爲嘉苗者滔滔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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