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개그 프로에서 ‘인기 없는 여자(무)’의 해법은 성형뿐이라고 외치고(KBS2 ‘개그콘서트’ 중 ‘요리하는 고야’ 코너), 케이블TV 오디션 프로에서는 “늙은이 미친 객기” 같은 가사가 여과 없이 방송된다(엠넷 ‘쇼미더머니’).
명품만 선호하며 사치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된장녀’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지 10년이 지났다. 2006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루저녀’(남자를 무시하는 여성) ‘김치녀’(몰상식하고 이기적인 한국 여성) 등 젊은 한국 여성 일반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 ‘된장녀’ 10년, 퇴행하는 대중문화
이 같은 차별·비하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도 깊이 파고든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업체인 엠브레인과 동아일보가 20∼40대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된장녀, 김치녀 등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차별·혐오 표현을 실제 사용해 봤다는 사람은 전체의 절반이 넘는 51.4%였다. 이 중 된장녀를 사용해본 사람이 208명으로 가장 많았고 김치녀가 110명으로 뒤를 이었다.
하지만 된장녀나 김치녀를 실제 만나 봤다는 사람은 각각 160명과 81명으로 해당 단어를 사용해 본 사람보다 수가 적었다. “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에도 “하는 행동이 그냥 그렇게 보인다” “이상한 사람” “무개념” 등 모호하거나 실제 정의와 다른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나본 적이 없는 불특정한 인물을 비난하기 위해 해당 단어를 추상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된장녀라는 표현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무시하는 분위기 확산’(30.4%) ‘저급한 인터넷 문화 확산’(21.8%)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14.8%) 순으로 답했다.
인터넷상에서 차별·혐오 표현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인터넷 혐오·차별 표현 시정요구 건수는 2013년 622건에서 2015년 891건으로 20% 이상 증가했다. 대상 역시 “국제 ×녀” “발정난 ×××” 등 특정 성(性)이나 “×××는 미개한 바퀴벌레 종족”처럼 외국인은 물론이고 장애인, 일본군 위안부, 독립운동가, 특정 지역까지 광범위하다.
○ ‘뉴 노멀’ 시대, 도덕 기준도 하향 평준화
문제는 인터넷의 이런 차별·비하 표현이 파급력이 큰 TV 프로그램에 곧바로 반영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1월 KBS ‘개그콘서트-사둥이는 아빠 딸’ 코너에서는 딸이 “나는 김치녀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그대로 내보냈다가 논란을 빚었다.
최근 인기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은 막무가내이면서 남자에게 무작정 의존하는 김치녀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다. MBC 드라마 ‘운빨로맨스’에서는 ‘호랑이띠로 태어난 남자와 잠자리를 하면 운명이 바뀐다’는 점괘를 맹신하는 보늬(황정음)가 주인공이다. tvN ‘또, 오해영!’에서는 주인공 해영(서현진)이 수시로 술을 마시고 직장동료나 상사를 가리지 않고 난동을 피운다.
한 방송사 PD는 “채널이 다양해지고 비슷한 콘텐츠가 많다 보니 ‘(시청률을 위해) 논란이 될 만한 것도 해볼까’ 하는 유혹이 생긴다”고 말했다.
대중문화를 연구해 온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인터넷 문화는 일종의 하위문화로 국민 전체의 여론을 반영한다고 보기 힘든데도 방송 관계자들이 ‘유행을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인터넷 문화를 여과 없이 TV에 반영하면서 방송에 특정한 편파성이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옥희 경희대 객원교수는 심각해지는 차별과 혐오 현상에 대해 “경제 불황기 사회 구조에 저항할 여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끼리 끊임없이 갑을 관계를 재정립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것”이라며 “‘뉴 노멀’ 시대(저성장이 일상화된 시대)에 도덕 기준까지 하향 평준화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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