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와 평안남도 연안에 출몰하는 중국인 어업자들을 막아내고…’(동아일보 1921년 10월 18일자)
서해바다의 영해를 침범하여 불법 조업을 일삼는 중국 어선들을 엄중 단속하겠다는 조선총독부 당국의 발표를 전하는 95년 전 신문기사의 한 구절이다. 중국 어선의 노략질은 조선 수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의 하나로 일찍부터 지목되고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도둑 잡기는 지난한 일이었다. 일찍이 청일전쟁에서 황해의 중국 전함을 궤멸시킨 일본의 해상 전력이었지만 어선에 대한 감시와 무력행사는 서해교전 못지않게 어려운 과제였다. 무력은 오히려 중국 배 쪽에서 더 자주 행사되었다. 또 하나의 상대, 해적(海賊) 때문이었다.
‘새벽 4시에 압록강 하류에서 조선인 어부 수십 명이 고기를 잡고 있던 중 중국 배 한 척이 나타나서 권총을 난사하며 습격했다. 선장은 복부에 탄환을 맞고 쓰러졌고 또 한 명의 어부는 중국인이 휘두른 장검에 찔려 유혈이 낭자한 참극이 벌어졌다. 즉시 강변파출소에 고발, 경관 여러 명이 출동하였으나 중국 배는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피해자 두 명은 신의주의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생명이 위독하다.’(동아일보 1929년 4월 13일자)
안동(지금의 단둥)의 일본영사관은 중국 측에 항의하는 동시에 범인 체포를 의뢰하였다. 문제가 국제적으로 확대될 모양이라고 기사는 전했다.
3년 뒤 비슷한 철에 유사한 사건이 되풀이되었다. 역시 신의주로부터의 급보가 신문을 장식했다.
‘새벽 3시 반 평안북도 용천군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조선인 어선 3척은 장총을 휴대한 중국 해적 15명의 습격을 받았다. 어부들은 도주했으나 해적들은 기어이 추적하여 총을 발사했다. 어부 한 명이 즉사하고 한 명은 행방불명. 해적들은 배에 올라 현금을 강탈하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32년 4월 16일자)
서해바다는 그렇게 중국인의 불법 어로와 해적질로 전장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전장은 내륙 깊은 곳 민물까지 번져 들어갔다.
1925년 12월 7일 낮 대동강 상류에서 조선인 어부 10여 명과 중국인 어부 10여 명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모두 자릿세를 내고 대동강에서 고기 낚는 사람들이었다. 그해 들어 처음으로 중국인도 당국에 허가를 얻어 조업을 개시한 참이었다. 중국인 특유의 고기잡이 노하우가 분쟁의 발단이었다. 가마우지라는 날짐승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그들 특유의 전통적 기법이었다. 문제는 이 방식이 크고 작은 고기를 가리지 않고 싹쓸이할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금지해 달라는 대동강변 어민 100여 명의 청원에 따라 당국은 3일에 한 번씩만 조업하라고 중국인들에게 통보했다. 중국인들은 아랑곳 않고 날마다 고기를 잡아 씨를 말릴 기세였다. 보다 못한 어민들이 제지에 나서 대판 싸움이 난 것이다.
‘중국인의 한국 해역 불법 조업의 역사는 길어서, 을사조약 후 한일합방 전 통감부 시절에도 서해에 침입해 기승을 부리는 중국 어부를 쫓아낸 것이 근 2만 명에 달했다. 이른바 ‘밀어(密漁)’라 불리는 이 불법 조업을 근절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 부두에 무장 경비선 여러 척을 배치하고 경계를 펼쳤다. 하지만 중국 어민들은 다시 침입해 왔고 새우잡이를 비롯한 어로 기법에서의 경쟁력을 앞세워 이후 조선총독부 시기 들어 한동안 서해 조업권을 사실상 묵인받기도 했다.’(동아일보 1931년 9월 5일자)
서해바다에서 중국인이 벌여 온 오래된 불법행위는 그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시절도 요사이처럼 중국 배가 한강 어귀에까지 밀려드는 꼴은 아니었다. 유엔군이 앞장서 중국 어선을 몰아내자 한국의 조치가 뒤따르고, 중국 배는 북한 영해로 숨어들어 제집인 양 둥지를 틀고 북한은 함구무언…. 혹여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남북한의 사람들의 요구대로 되기라도 한다면 어떤 종류의 침략이건 자력으로 물리치는 일이 이 땅과 바다에서 수월할까를 되묻게 하는 병신년의 꽃게 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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