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기자의 필담]“법조계는 지금 칼잡이 기술자만 키우고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7일 03시 00분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유금와당박물관장 유창종

유창종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겸 유금와당박물관장은 로펌과 박물관 일에 업무 시간을 절반씩 할애한다고 말했다. 로펌 사무실에 나갈 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박물관에 있을 땐 이렇게 차이나 칼라의 윗옷을 입는다.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지어준 옷이라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유창종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겸 유금와당박물관장은 로펌과 박물관 일에 업무 시간을 절반씩 할애한다고 말했다. 로펌 사무실에 나갈 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박물관에 있을 땐 이렇게 차이나 칼라의 윗옷을 입는다.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지어준 옷이라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진영 기자
이진영 기자
4·19혁명 땐 고려대에 진학해 데모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중3 때다. 이듬해 5·16군사정변이 났을 땐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쿠데타를 해야 하나 싶었다. 야심만만한 대전고 수재는 결국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사가 됐다. 슬롯머신 사건, 이용호 게이트, 대북송금 의혹 사건을 수사했고 대검찰청 초대 마약과장에 대검찰청 중수부장, 서울지검장을 지냈다. 검사로서의 운은 30년, 거기까지였다.

전관(前官) 예우부터 현관(現官) 로비까지 법조계 비리로 나라가 시끄러운 와중에 검사 유창종을 떠올린 건 변호사로 ‘떳떳하게’ 벌어 국내 유일의 기와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며 ‘풍요로운’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어서다. 세속에서 상식으로 일군 삶은 은둔형 딸깍발이 선비의 죽비소리 못지않게 후배 법조인들, 법조 비리에 실망한 이들에게 울림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수사는 증거로, 미술은 유물로 입증”

평양 청암리 사지에서 출토된 높이 39.3㎝의 도깨비얼굴무늬마루끝기와.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가 웅건 활달한 고구려 기와의 특징을 잘나타낸다. 이우치 컬렉션.
평양 청암리 사지에서 출토된 높이 39.3㎝의 도깨비얼굴무늬마루끝기와.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가 웅건 활달한 고구려 기와의 특징을 잘나타낸다. 이우치 컬렉션.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중턱에 정남향으로 자리 잡은 유금와당박물관을 찾았다. “와당부터 감상하시지요.” 유 관장이 전시실로 안내했다. 마침 ‘돌아온 와전 이우치 컬렉션’이 열리고 있었다. 일본인 컬렉터 이우치 이사오(井內功)의 소장품으로 유 관장이 사재로 사들여 환수해 온 한국 와전 1296점 가운데 16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와당(瓦當)은 기와지붕 끝을 마감하는 기와로 다양한 무늬가 장식돼 있다.

“고구려 와당은 웅건 활달하죠. 이쪽 백제 와당은 고아한 귀족적 기품이 느껴지죠? 통일신라에 와서 와당예술은 정점에 도달합니다.(기와 문화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에서 건너온 거지만), 이런 건 중국엔 없는 겁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민속적이고 해학적인 독특한 와당이 출현하지요.”

검사 출신인 유 관장의 꼼꼼한 설명을 들으며 그가 와당을 상대로 수사하는 엉뚱한 모습이 그려졌다. “피의자 와당은 언제 누구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는지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그는 1978년 2월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로 발령받은 후부터 공부 모임을 만들어 주말마다 답사를 다니고 기와를 수집해 왔다. 당시 기와는 고미술품을 살 때 덤으로 주기도 하는, 검사 월급으로 수집 가능한 문화재였다.

―범죄인을 수사하고 문화재를 수집하는 일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사는 증거로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일이죠. 고고학과 미술사는 유물로 어렴풋한 문헌의 기록을 입증하는 겁니다. 검사로서 논리적 사고 훈련이 돼 있어 와당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거꾸로 와당 연구가 수사에도 도움이 되던가요.

“와당을 연구하는 건 한중일 문화교류사를 연구하는 건데, 3개국 3000년을 넘나들다 보면 시야와 사고의 틀이 넓어지죠. 무엇보다 검사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예술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 범죄와 전쟁을 치르려면 몸과 마음이 바쁘거든요.”

―검사 사주에 들어 있다는 칼의 부담을 흙의 기운으로 덜었다는 뜻인가요.

“검사 일 정말 좋아했습니다. 비리와 거악을 척결하는 일, 얼마나 멋있습니까. 검사 된 지 한 달 만에 전국 8개 자해공갈단 조직을 일망타진했어요. 1994년엔 송종의 서울지검 검사장과 홍준표라는 독특한 검사와 함께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했죠. 정계 안기부 법무 검찰 경찰 수뇌급 인사까지 기소 대상이 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검사들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 제가 그랬어요. 우리가 이런 것 하려고 검사 된 것 아니냐. 군인 되려고 육사 나온 사람이 전쟁터 가서 밤새 전쟁한다고, 그러다 다리에 총 맞을지 몰라 힘들다고 하면 되겠느냐고요.”

“前官 대접, 절제해야”

―검사 일에 자부심이 컸던 만큼 요즘 검사 비리 사건을 보며 실망이 크겠습니다.


“돈 벌겠다고 검사 하면 안 되지요.”

―전관예우와 관련 있는 형사 사건을 거의 맡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에게 도를 넘는 돈을 받는 게 아니죠. (업계 톱이 아닌) 법무법인 세종을 선택한 이유도 윤리의식이 강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관예우가 나쁜 게 아닙니다. 전관예우를 악용하는 일부 사례가 나쁜 거지요. 전관이란 경험과 지혜가 있어 대접받고 돈을 더 버는 겁니다.”

얘기가 전관예우와 법조계 비리로 이어지자 유 관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관이라고 다 돈 잘 버는 게 아닙니다. 검사장 출신들 중엔 사무장도 못 두고, 버스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요. 실력 차이가 있는 겁니다. 나는 변호사 생활 3년간 홍만표(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 관련 법조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검사장 출신 변호사)보다 사건 더 많이 맡았습니다.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수임료를 3분의 1로 줄여달라고 했죠.”

―일반인들의 생각과 거리가 있네요. 고위 판검사로 퇴직한 경우 일정 기간 변호사 개업을 금지하는 ‘홍만표방지법’까지 도입하자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건 사고 치니까 애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네요. 저도 검사장실 가서 사건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父子) 구속은 윤리에 반(反)한다, 부자 구속을 피해야 아버지를 엄하게 처벌할 수 있는 구실도 생기는 거다, 이런 식으로 의견을 말합니다. 전관의 경험은 활용돼야 합니다. 단, 의와 불의를 바꾸고, 선과 악을 바꾸면 안 되지요.”

―무리한 수사로 기업에 피해를 준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검사는 외과의사입니다. 수술은 최소한만 해야죠. 환부 도려내고, 재발하지 않도록 해놓고 끝내야지요. 혹시 전이됐을지 모른다고 장기를 이것저것 다 들쑤시면 안 됩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하고, 소환도 최소한으로 하고, 사법처리 범위도 넓지 않아야 하고요.”

―법조인의 윤리의식 제고가 절실합니다.

“지금의 법조인 양성 교육은 수사 잘하는 기술자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수사하고 판결문 쓰는 건 6개월만 하면 다 잘하게 됩니다. 어려운 사람 법률 구조도 하고, 피의자들과 교도소에서 일주일씩 살아 보게도 하고. 칼잡이 외과 기술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 가린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수사 사령탑을 맡았던 이용호 게이트 부실 수사로 대검 중수부장에서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됐다가 같은 해 서울지검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2003년 노무현 정부 ‘검찰 인사 파동’ 때 대검 마약부장으로 후배를 상사로 모시게 되자 사표를 냈다.

“주위에서 놀라더군요. 며칠간 여행하면서 마음 추스르고 하지도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퇴임식 하고, 오후에 세종에 가서 책상 확인하고, 다음 날 출근했거든요. 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교 때 ‘한다발’이라는 대전지역 고교생 철학모임을 만들어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검사 일을 그만두면 와당을 즐기고, 와당의 깨우침을 나누며 살겠다고 생각했죠.”

변호사 수임료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를 팔아 2008년 3월 박물관을 개관했다.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운영비가 월 수천만 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렸지만, 부인인 금기숙 홍익대 섬유미술학과 교수(64)가 “그냥 하자”고 했다. 박물관 이름 앞 글자 ‘유금(柳琴)’은 유 관장 내외의 성을 따왔다. 부부는 박물관의 공동 관장이다.

박물관은 5000점이 넘는 동아시아 기와와 전돌, 그리고 금 교수가 복식문화 연구를 위해 수집해 온 중국 도용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학예사 3명을 포함해 직원이 5명이고, 매년 4000명이 다녀가는데, 그중 3000명이 초중고교생이다. 유 관장은 육십 넘어 배운 중국어와 일본어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매년 700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다고 했다. 다음 달 13일엔 동북아역사재단 수요포럼에서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 쟁점들’을 주제로 강의한다.

―‘검사는 폭탄주 마실 때만 박수 받는 직업’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검찰을 떠나고 박수 받는 일이 많은 듯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슬롯머신 사건, 마약수사로 이름이 알려지자 순천지청장 시절에 정치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자민련에 고시 합격자가 없고, 대전고 나와 명성 가진 이가 없다고요. 제가 ‘국회의원 선거법에 유창종은 평생 국회의원 할 수 있다고 돼 있어도 안 한다’고 했어요.”

그는 어깨가 처져 있을 후배 검사들에게 이런 말도 전했다.

“어려서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서 살았는데, 강경 장이 유명해요. 장날에 가면 시장 골목 입구에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들이 있어요. 뭐 하는 분들인가 궁금했는데, 장날이 되면 다들 장에 가니까 불안해서 집에 못 있고 나오신 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좋다는 것만 좇아 사는 거죠. 검사는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문화인이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기와 검사’ 유창종▼


△1945년 충남 당진 △1964년 대전고 졸업
△1969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74년 사법연수원 4기 수료,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78년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 시절 기와 수집 시작
△1979년 2월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과 충주고구려비 발견, 국보 205호로 지정
△1987년 서울올림픽조직위 법무실장
△1989년 대검찰청 초대 마약과장
△1993년 서울지검 강력부 부장검사
△2000년 대검 강력부 부장검사(검사장)
△2001년 대검 중앙수사부 부장검사
△2002년 서울지검 검사장
한중일 와전(瓦전) 1873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2층에 ‘유창종 기증와전실’ 개설,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2003년 대검 마약부 부장검사
△2003년∼현재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2005년 일본 이우치 와당 컬렉션 1301점 사들여 국내 환수
△2006∼2011년 국립중앙박물관회장
△2008년 유금와당박물관 설립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유창종#유금와당박물관장#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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