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공항을 어디다 두느냐로 큰 분란이 있었지만, 90여 년 전에는 도청을 어디에 두느냐로 영남에서 큰 갈등을 빚은 일이 있다. 그때는 부산이냐, 진주냐로 충돌했다. 부산이 경남의 한 도시이던 시절 얘기다.
‘경상남도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일로 진주 사람들은 극력으로 당국에 반대 운동을 하는 중이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1일자)
도청의 이전 결정이 조만간 발표되리라는 보도가 처음 나온 4월 8일 이후 들끓는 진주의 민심을 전하는 기사다. 경남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자부심에 더해 생활의 편의와 경제적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라 인화성이 매우 강했다. 1920년대 전반 5년을 휩쓸게 되는 갈등의 서막이었다.
‘도청 이전이 부산으로 내정되었다는 소문에 진주 시민들은 크게 놀라 인심이 소란한 가운데 상점 문을 굳게 닫고 시민대회를 열고 여론이 격렬하다. 대회를 언제까지든 계속하여 도청 이전을 중단시키려 운동 중이다.’(4월 13일자)
경남도지사는 기자의 확인 요청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도청이 진주에 있든 부산에 있든 이해는 상반되기 마련이니까, 내 자신의 희망은 말하지 않겠소. 도청이 진주에 있으면 경남의 중심 지점이어서 행정상 가장 편리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으나, 기찻길에서 3백 리나 떨어진 불편한 곳에 도청을 두는 것은 도의 행정 처리상 심히 불편하오.’(4월 21일자)
마산∼진주 철도가 아직 연결되기 전이었다. 일본인 도지사는 덧붙여 말하기를, ‘진주는 조선인이 많이 살고 부산은 일본인이 많이 사니까 일본 사람 편의만 위하여 이전한다고 진주 시민들은 말하나 이는 감정으로 나오는 말이요, 사실상 도의 사무 처리상 그러한 것’이라 했다.
진주 시민들은 ‘도청 이전 방지 동맹’을 결성했다. 시민 대표 8명이 총독부로 올라가 상경 투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평안북도 도청은 의주에서 신의주로 이전이 결정되어 청사 신축에 들어갔다. 함경북도 도청은 새로이 떠오른 요충지 나남으로 이전이 완료되었다. 동아일보의 매일 고정 칼럼 ‘횡설수설’은 이렇게 물었다. ‘경의선상에 있는 사리원에서는 도로공사가 한창인데, 황해도청을 해주로부터 사리원으로 옮길 준비라 한다. 이번에는 해주 시민이 반대 운동을 개시할 순서인가.’(1921년 6월 6일자)
이후 경남도청 이전 논란은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1924년 연말 도청 이전이 전격 발표되었다. 이전 설이 처음 보도된 지 4년 8개월 만에 확정 발표가 나온 것이다. 부산을 중심으로 인근 군에서는 찬성하는 여론이고,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에서는 크게 분개하여 연일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호외까지 발행한 신문기사의 제목이 그 분위기를 전해준다. ‘도청 이전 문제로 전장처럼 변한 진주 일대의 살기’ ‘운동단체 결사시위, 공직자 연대 사직’….
반대 측은 다시 상경 투쟁에 나섰다. 조선인 5명과 일본인 6명 등 지역 유지들로 이루어진 대표단은 총독부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진정했다. ‘대다수가 조선 사람인 진주 및 인근 14군의 130만 도민 의사를 무시하고, 일본 사람이 다수인 부산 및 인근 5군의 50만 명을 위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은 식민정책 철저 실행 외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
부산 인근의 5개 군은 동래 울산 양산 김해 밀양이었다. 모두 한마음으로 부산 유치를 환영했다. 1924년은 그렇게 가고 그 다음 해 3월에 도청 이전 작업이 벌어졌다. 도청 직원 391명, 가족까지 14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 조선인의 집단 이주였다. 진주로서는 도청을 빼앗김으로 해서 도시의 세가 기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도청도 주민의 뜻과 무관하게 외국인의 판단에 따라 이전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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