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이노우에 야스시 지음/김춘미 옮김/384쪽·1만4000원·문학판
거의 반세기 전 일본인의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매년 개정판이 나오는 여행 가이드북 따위에서 접하는 최신 정보야 애당초 기대할 수가 없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하물며 50년이랴…. 그런데 거대한 시간의 벽이 오히려 이 책의 매력 포인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랄까.
저자는 1907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에 징집된 경험이 있는 이른바 ‘메이지(明治)인’이다. 일본에서 메이지인은 산전수전 다 겪고 조국의 경제 기적을 이끈 역군으로 묘사된다. 초식남과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판치는 현대 일본의 나약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실제로 저자는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각국의 현장을 치열하게 답사하는 부지런한 작가다.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기자 출신인 저자가 쓴 글답게 이 책에서는 1960년대 유럽과 소비에트, 미국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세계를 휩쓸기 전 냉전시대의 사회 풍경과, 이런 세태와는 별도로 면면히 이어진 보통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예컨대 유럽 여러 도시에서 목격한 노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파리의 공원에서 본 노인들은 한없이 쓸쓸했고, 독일 베를린 시내를 산책하는 노인들의 표정에서는 무료함이 읽힌다고 썼다. 세계 최고의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스웨덴 노인들은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풍족한 소비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쓸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저자는 “일본은 노인 생활보장제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불우한 셈이지만 외국의 노인들과 비교해 더 불행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다. 1960년대 일본의 가족주의는 본격적인 해체를 맞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가족과 공동체에서 분리된 개인주의 사회에서 노인복지의 한계점을 갈파한 서술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대독 전승 기념 퍼레이드’를 관람할 수 있는 장소가 사전에 지정됐던 1965년 소비에트 치하의 모스크바 풍경도 색다르다. 저자는 크렘린 궁전의 붉은 광장까지 3, 4곳의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일일이 여권을 제시해야만 했다. 특히 실내수영장에서 이용자들이 몸에 비누칠을 하는지 감시하는 의사와 너무 오래 수영하는 사람들을 긴 막대로 제지하는 직원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벗어난 지방은 사회주의 시스템의 블랙코미디와는 달랐다. 저자는 돈독한 신심을 지키며 아름다운 자연에서 생활하는 러시아 노인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역사소설 ‘오로시야국 취몽담’을 쓰기 위해 18세기 일본인 선원들이 표류한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1968년 답사한 기록도 볼만하다. 일본 역사소설의 대가답게 200년 전 이르쿠츠크의 건물과 거리를 세밀하게 고증했다. 예를 들어 표류 직후 피폐해진 심정을 안고 이곳에 도착한 선원들이 처음 목격했을, 그리고 단 두 명의 선원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보았을 첨탑을 묘사한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인 포로들도 거친 이 도시에서 저자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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