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재래시장을 지날 때 폐업을 앞둔 속옷 가게에서 재고떨이가 한창이었다. 아무런 장식도, 색깔도 없는 여성용 면 팬티가 다섯 장에 5000원. 시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속옷 더미 앞에는 ‘엄마용 빤스 세일 중’이라는 색도화지가 붙어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은 애초부터 예쁘게 치장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시장통에 박제된 것 같아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두고두고 마음이 쓰였던 기억이 있다.
7월 2일 종영한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엄마의 빤스’ 같은 애틋함이 녹아 있는 드라마다. ‘중년’ 또는 ‘꼰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우리네 엄마 아빠의 인생이 시장에 펼쳐진 무채색 속옷처럼 수수하게 그려졌을 뿐인데 마지막 회 시청률 7.17%(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로 케이블채널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네이버 TV캐스트에서는 관련 동영상 클립이 1500만 번 이상 재생됐다.
‘시니어벤저스’로 불리는 쟁쟁한 중견 배우들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출생의 비밀과 재벌, 아이돌 출연진으로 무장한 드라마들 사이에서 이 드라마가 공감을 이끌어 낸 비결은 ‘이해의 마법’에 있다.
전쟁-산업화를 겪은 세대와 유례없는 학업-취업 경쟁에 내몰린 세대의 갈등은 세대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인생은 부모와 자식 간의 전쟁’이라는 대사처럼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삶을 차분히 이해할 여유조차 없이 악다구니만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화자인 완이(고현정)는 엄마(고두심)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엄마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기로 한다. 어렵지만 엄마에 대한 이해로 갈등을 극복하고 남은 인생을 웃으며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암에 걸리고 나서야 딸과 엄마는 친구가 된다. 예순이 넘어 연하남과 ‘썸’을 타는 엄마에게 “그 남자랑 잤어?”라며 깔깔거리며 웃는 딸. 암에 걸린 엄마는 “아이구, 딸년이라고 에미한테 ‘남자랑 잤냐’가 뭐야”라며 질색하면서도 친구처럼 들이대는 딸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이가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을 ‘친구’로 바라봤듯, ‘디어 마이 프렌즈’는 누구나 겪게 될 시간을 먼저 겪은 세대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로에게 손을 내밀 기회를 줬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지금 내 나이의 엄마를 만난다면’이라는 글이 화제다. 결코 만날 수 없는, 자신과 동갑인 나이의 엄마를 만난다면 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댓글로 전하는 이 글은 여성 회원이 많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터넷상에서 번지고 있다.
‘아빠와는 절대 결혼하지 말라’거나 ‘공부를 다시 해서 꿈을 펼쳤으면 좋겠다’라는 댓글 속에서 ‘나이를 먹어서야 비로소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는 고백들이 눈길을 끈다. ‘엄마 장하다.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견디기 힘든 것들을 엄마는 어떻게 다 견뎠어.’
인생의 고비를 몇 번 넘긴 다음에야 ‘꼰대’나 ‘개저씨’, ‘개줌마’로 규정된 세대가 왜 그렇게 고단하고 치열했어야만 했는지, 때로 왜 그렇게 염치가 없었고 예의를 차릴 여유조차 없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드라마는 끝났지만 세대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부모 세대가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우리 세대의 숙제는 무엇인지, 한 세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마침내 서로 이해하고 의지할 때 어떤 마법이 일어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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