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덕궁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은 인정전이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이다.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임금이 앉는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 놓여 있다. 어좌 위로는 화려한 장식의 닫집(보개·寶蓋)이 펼쳐진다.
그런데 인정전엔 경복궁 근정전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인정전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샹들리에다. 조선시대 궁궐에 서양식 전등이라니.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1907년 즉위와 함께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고는 이듬해 창덕궁의 수리를 명했다. 순종이 명했다고 하지만 실제 작업은 일제가 맡았다. 인정전의 샹들리에는 그때 유리창, 커튼과 함께 설치되었다. 일제는 실내 바닥의 전돌도 걷어내고 일본식 나무마루로 바꿨다. 공사는 1909년 봄 마무리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샹들리에였다. 인정전 샹들리에는 자못 화려하고 육중하다. 노란 천으로 휘감은 뽀얗고 큼지막한 전등들. 샹들리에 틀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무늬를 디자인해 넣었다. 샹들리에 전깃불은 첨단 서양문물이었고 근대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도입된 것은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처음 전깃불이 들어왔다. 에디슨이 전구를 활용한 이후 불과 8년 만이었다. 현재 건청궁 앞에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 전깃불이 20여 년 뒤 창덕궁에도 들어왔고 샹들리에까지 설치한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 사는 공간도 변하는 법. 궁궐 전각에 전등을 설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0세기를 살아가는 임금님이 꼭 19세기 스타일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샹들리에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창덕궁의 밤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창덕궁의 샹들리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인정전을 수리하고 샹들리에를 매단 것은 결국은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전기 공급이 원활치 않아 전구가 자주 깜박였고 그로 인해 수리비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전구가 제 역할을 못한 것이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 모습이 마치 건달 같다고 해서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깜박깜박하는 전등. 당시 우리의 국운과 비슷했던 것일까. 1910년 8월 그곳 창덕궁에서 조선의 5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세기 초 신문명을 상징했던 창덕궁의 전깃불 샹들리에. 우리는 그렇게 근대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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