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미국 뉴욕 컬럼비아 스튜디오에서 전용의자에 앉아 연주 중인 글렌 굴드. 글항아리 제공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1998년 연재를 시작한 ‘배가본드’에서 뜻밖의 선택을 했다. 막 인기를 얻은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를 상당 기간 완전히 감춰버린 것. 중반부에 등장시킨 라이벌 사사키 코지로가 조연이 아닌 또 다른 주연으로 다뤄졌다.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결투를 향해 가는 두 인물의 행적을 동등하게 병렬시키려 한 작가의 야심은, 기약 없는 연재 중단으로 좌초된 상태다.
이 책의 전반부는 배가본드를 닮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간략한 성장기에 이은 두 번째 장에서 느닷없이 그보다 1년 앞서 태어난 시각장애인 조율사 샤를 베른 에드퀴스트의 삶을 짚는다. 다음 장의 주인공은 굴드가 열 살 무렵 멀리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한 대의 피아노다. 저자는 20여 년 뒤 이들 셋이 조우해 다시없을 특별한 소리를 쏟아낸 10년간을 절정부로 놓고 각자의 삶을 소개했다. 굴드를 위해 한 대의 피아노를 수천 번 조율한 에드퀴스트가 그랬듯, 피아노 ‘CD 318’은 과묵한 생명체처럼 묘사된다.
원제 ‘A Romance on Three Legs’는 그랜드피아노의 세 다리와 함께 세 갈래 삶의 짧은 만남을 지칭한다. 중심은 물론 굴드다. 이 책은 너무 익히 들어 식상해진 굴드의 결벽적 삶에 낯선 재료를 추가해 흥미롭게 재구성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음 후광 없이 굴드의 손가락이 내리는 명령에 세심하게 반응했던’ 유일한 피아노, 그 둘을 매개했던 명민한 조율사에 대한 재조명은 굴드의 음반을 듣는 행복감의 폭을 몇 뼘 넓혀준다.
취소된 원정 콘서트에 홀로 보내졌다 사고로 땅바닥에 처박힌 피아노가 절명하면서 이들의 연애는 세상 모든 연애처럼 예고 없이 끝장난다. 얼마 뒤 한때의 전담 조율사 에드퀴스트는 굴드의 부고를 라디오 뉴스로 접한다. 새 부품으로 수리돼 홀로 남은 피아노의 뒷얘기는 관우 잃은 적토마를 연상시킨다. 한 연주자가 어떤 피아노를 만나 ‘마음속에 늘 꿈꾸던 소리를 실현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기적이다. 굴드는 ‘그 피아노를 알아봤다’고 했다. 모든 연애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알아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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