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북카페]국가신도주의 지향… 50년 집요하게 투쟁… 日우익의 뿌리 탐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1일 03시 00분


스가노 다모쓰 ‘일본회의 연구’

“너희,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전단을 뿌리는 거야!”

1966년 7월 3일. 일본 규슈(九州) 나가사키(長崎)대 정문 앞.

우익 성향의 대학생 안도 이와오(安東巖)와 가바시마 유조(P島有三)는 ‘학내 데모를 반대한다’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좌익 학생운동 진영에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얻어맞은 후 밤새 만든 전단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둘은 ‘좌익 학생운동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스가노 다모쓰(菅野完)는 5월에 펴낸 ‘일본회의 연구’에서 이날이 바로 일본 내 최대 영향력을 가진 우익단체 ‘일본회의’의 출발이었다고 지적한다. 두 대학생의 ‘좌익 타도’ 열망이 50년 동안 증폭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탄생시키고, 개헌을 추동하는 거대한 파도가 됐다는 것이다.

두 대학생은 이날 이후 조직을 만들어 학내 선거에 매달렸고 온갖 수모와 폭력을 당하면서도 선거에서 연전연승했다.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대학을 좌익 학생으로부터 되찾아온 이들은 우파 진영의 ‘상징’이 됐다.

둘은 신흥 우파 종교단체 ‘생장의 집(生長の家)’ 신도였다. 그들은 종교 조직을 바탕으로 우익 학생운동의 범위를 전국으로 넓혔다. 폭력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합법의 테두리에서 끈질기게 싸우는 것이 이들의 방식이었다.

생장의 집은 이후 정치 노선을 포기했다. 하지만 소속 청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측근인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보좌관, 아베 총리의 브레인인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일본정책연구센터 대표 등 정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위에 올랐다. 아베 총리의 정치적 후계자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정무조사회장의 경우 “할머니로부터 받은 (생장의 집 경전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역이었던 가바시마는 일본청년협의회를 만들고 본격적인 우익 활동을 전개했다. 1995년 일본이 침략전쟁의 책임을 인정하는 ‘전후 50년 결의’를 추진할 때 ‘500만 반대서명’을 모은 것도, 자민당 간사장의 넥타이를 쥐고 흔들어 결의안 참의원 통과를 막은 것도 그였다. 저자는 안도 역시 생장의 집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본다.

가바시마는 좌익에 거부감을 가진 종교단체 등을 하나로 묶어 1997년 일본회의를 만들고 사무총장을 맡았다. 전국 조직인 일본회의는 지금도 철저히 합법 테두리 내에서 활동한다. 지방의회에 의견서를 채택하도록 청원하고, 대규모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1만 명 이상을 동원해 집회와 시위를 열며 세를 과시한다. 다양한 연구모임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하고, 여러 단체를 조직해 이슈마다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집요한 노력의 결과 그들은 현재 아베 총리를 포함해 아베 정권 각료의 80% 이상이 참여하고, 국회의원 281명이 소속된 막강한 단체로 성장했다. 이들은 전후 최초의 ‘개헌’을 목표로 1000만 명의 서명을 받는 총력 투쟁을 전개 중이다.

저자는 일본회의의 최종 목표가 일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신도주의를 표방한 ‘메이지 헌법’의 복원이라고 분석한다. 비민주적 목표를 위해 철저하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일본회의의 아이러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저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책을 쓰기 위해 꼬박 1년 동안 일본회의 관련 자료와 증언을 수집했다. 일본회의는 책이 출간되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며 출판사에 출판 중단을 요청했으나 이런 사실 등이 화제가 돼 두 달 만에 12만 부 이상 팔렸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우익#뿌리#일본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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