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이맘때 조선의 국왕과 정부는 러시아로 출장 떠난 사절단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의 신변 안전 문제가 당면 과제였다. 체류 기간이 만 5개월을 넘어서는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와 거처를 옮기게 될 경우에 필요할 경비병력을 러시아에 요청했기 때문이다.
‘경비 문제는 심사숙고 중이다. 최종 결정은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의 조언에 달려 있다.’
이러한 요지의 중간 회신을 7월 12일 러시아 측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모스크바 파견 사절단의 윤치호는 일기에 적었다. 1896년, 병신년이었다.
조선에 대한 오랜 패권을 상실한 중국. 조선의 새로운 종주국이 되고자 하는 일본, 그 전환기에 조선의 보호자 역할을 떠안은 러시아. 지역 균형이 깨진 환란의 시기에 조선은 스스로를 지킬 군사력이 없음을 거듭 드러낸 채 말이 통하는 동족끼리 입씨름만 거듭하는 중이었다.
모스크바의 황제 대관식에 조선과 더불어 초청된 중국과 일본은 최고위 실권자가 직접 참석해 러시아를 상대로 긴밀한 외교 협의를 벌였다. 조선을 따돌리고 진행된 그들 간의 막후 협상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간여에 일정한 제동을 가했다. 이 사실을 모스크바의 조선 대표들은 알 길이 없었다.
중국 사절단의 대표 이홍장은 조선 대표 민영환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조선의 국왕은 아직 러시아 공사관에 있소?” 중국은 일본에 쫓겨난 이래 조선에서 공사관 기능을 상실했고 서울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미국은 그들처럼 노골적인 정치적 군사적 개입은 금하고 단지 황실과 민간에 호의적인 지원을 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사절단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대표 민영환과의 불화 속에 힘겨운 여행을 한 보좌역 윤치호는 노선을 달리해 파리로 가고. 대표단의 귀국에 즈음해 그 외유의 의미가 ‘독립신문’에 났다. 서재필이 주로 집필하는 1면 논설은 ‘공식 사절을 유럽에 보내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세계에 널리 알렸으니 나라의 경사’라고 축하했다. 그리고 국왕을 호위할 러시아 군인 10여 명을 초빙하여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이 잘되려면 첫째 나라가 조용하여야 할 터인데, 나라 안에 소란한 일이 없게 하려면 튼튼한 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 군사가 지금 외국 군사만 못한 것은 군대 내에 규칙과 제도적 틀이 미비해서다. 조선이 큰 군대는 두지 못할지언정 강하고 틀이 잡힌 군사를 두어 군주 폐하를 염려 없이 보호하고 나라에 난동을 피우는 무리들이 없게는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독립신문’ 1896년 10월 24일자)
그리고 신문은, 해외여행 중 내내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노라는 단장 민영환의 소감을 전하며, 세계를 견학하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그가 ‘조선인민을 엉터리 속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기를’ 소원했다.(1896년 11월 10일자)
민영환은 그렇게 해보려 했다. 그러나 9년 뒤 을사년에 자결했다. 그전에 ‘독립신문’도 19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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