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을 멋스럽게 빗어 넘긴 권성 전 헌법재판관(75)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최근 펴낸 책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책 제목은 ‘흥망유수’(흥망에는 필연적인 이치가 있다는 뜻). 역사적으로 나라들이 왜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는지 원인을 진단한 역사책이다.
권 전 재판관은 1967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헌법재판관을 거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장 등을 지낸 법조인이다. 그가 역사책을 낸 배경이 궁금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호지, 삼국지 등 역사소설을 책상에 쌓아 놓고 읽는 독서광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읽은 책이 늘수록 국가의 흥망을 가르는 요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현실과 역사에서 깨달은 것들을 정리해 청년들에게 알려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는 대개 리더십이나 처세술입니다. 이와 관련한 좋은 책은 이미 많이 나왔죠. 그래서 국가, 사회, 조직 등 청년이 꼭 알아야 하지만 접하기 힘든 정보를 역사를 통해 말하려 했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 논쟁이 한창이던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정부 측 대리인으로 나섰던 그는 역사에서 배운 논리를 폈다. 그는 당시 최초 변론문에서 “임진왜란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벌하러 갈 테니 조선은 길만 내달라고 했듯 (통진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해 자유민주주의는 길을 트라고 하는 것”이라며 해산을 주장했다.
최근 유명 영화감독과 한 여배우의 스캔들이 화제가 되며 간통죄 폐지의 부작용이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다. 15년 전인 2001년 헌재에서 유일하게 위헌 의견을 냈던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영화감독의 스캔들에 대해선 즉답을 피하면서도 “인격체로서 인간은 성적인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자율권이 있고 이는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헌재에서 ‘미스터 소수의견’으로 불렸던 그는 “남녀 관계는 미묘하고 복잡한데 국가 권력은 대단히 간단하다”며 “간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간통죄로 다스리는 게 과연 옳은 것이냐 물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들도 가끔은 ‘소수 의견’을 내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저서에 담긴 ‘왕맹’의 사례를 꺼냈다.
“4세기 말 북부 중국을 통일한 왕 부견은 주위의 반대에도 피정복민인 왕맹을 발탁해 나라를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내 생각이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해도 용기를 잃을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국운을 좌우할 요인은 무엇일까. 그의 답은 명쾌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선거에서 승부가 난 뒤에는 다음 선거 때까진 패자가 승자를 존중하고 승자도 패자를 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분이 생기지요. 사람 몸도 질병에 시달리면 죽듯이 나라도 내분이 계속되면 에너지가 고갈돼 망합니다.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훈련이 덜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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