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한 일부 기업이 부실을 감추려고 분식 회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복식부기를 사용한 개성상인들의 회계 관리가 현대 기업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와 주목된다.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글로벌한국학부 교수(사진) 연구팀은 1887∼1912년 개성상인의 회계 장부를 분석한 결과 이들이 현대적 회계를 통해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하고 주기적으로 손익을 배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전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최근 이탈리아 페스카라에서 열린 ‘제14차 세계 회계사(會計史) 대회’에서 ‘한국 개성에서의 자본계정의 탄생’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개성상인은 1년 단위로 손익을 측정해 그 한도 내에서 투자자에게 배당했고, 이를 이익잉여금처분계산서로 기록했다. 전 교수는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선박 무역에서 배가 돌아온 뒤 투자자의 수익을 분배하고 회사를 청산하는 식으로 일회성 이익 분배가 이뤄졌다”며 “현대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영업 이익을 해마다 주기적으로 측정해 회사의 지속성을 담보한 회계 기록은 개성상인이 최초”라고 말했다.
전 교수 연구팀이 개성상인의 회계 문서에 한자로 쓰인 내용을 번역한 결과를 현대적 회계 항목에 대입한 결과 거의 그대로 일치했다. 개성상인은 복식부기로 분개장(거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장부), 총계정원장(모든 계정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장부)뿐 아니라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구분해서 작성했다.
개성상인은 소유와 경영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었다는 것도 확인됐다. 도중(都中·경영 조직)이 경영을 모두 맡고 투자자는 배당만 받았다. 투자자와 도중은 손익을 절반씩 나눴다. 손해가 나도 절반, 이익이 나도 절반씩이었다.
1897년 3월 설기동 도중의 삼포(蔘圃)에서는 매출(6만4154냥 5전 5푼)에서 매출 원가와 판매관리비 등(5만4414냥 6전 9푼)을 제하고 9739냥 8전 6푼의 당기순이익이 났다. 투자자 박성삼과 경영자 설기동 도중은 이를 정확히 반씩 분배했다. 전 교수는 “이 방식은 경영자의 책임 경영을 유도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베니스와 유대 상인은 통상 경영자가 이익의 4분의 1에서 3분의 1만 가져가는 대신 손해가 났을 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고 전 교수는 설명했다.
또 개성상인은 상품의 구매가와 판매가만 계산하는 중세의 상업회계가 아니라 매출(제조) 원가를 계산하는 현대적 기업회계를 사용했다는 점도 확실히 드러났다. 개성상인의 회계 장부에는 삼포 조성비, 종자 구입비, 흙 고르는 비용, 운송비, 노임 등 매출 원가가 꼼꼼히 기록됐다. 심지어 고사를 지내는 데 쓴 비용도 나온다. 투입된 항목별로 실제 시장에서 거래된 단가가 기록돼 투명성을 높였다. 전 교수는 “개성상인이 중세 복식부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이번 연구로 현대의 제조 기업과 동일한 기업회계를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도 1885년경까지는 복식부기로 제조원가 회계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게 통설이다.
전 교수는 “이번 회계사 학술대회에서 구미 학자들은 ‘복식부기의 원가 기록은 2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한국 측의 발표로 무너졌다”며 “개성상인의 회계 기록은 근대 자본주의 기업이 조선 후기에 존재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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