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신문에서 자백하지 않으면 형신(刑訊·앉혀 놓고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을 가했다. ‘생불이 출현할 것’이라는 난언(亂言)을 퍼뜨린 차충걸은 6차례 형신으로 180대를 맞은 뒤 7차 형신에 이르자 고통을 참지 못해 자백했다. 형신으로도 자백하지 않는 자는 사금파리 위에 꿇어앉혀 무릎을 돌로 누르는 압슬형에 처했다.”
최근 발간된 ‘조선 민중 역모 사건’(위즈덤하우스)의 골자는 조선시대 특별사법기관인 의금부의 재판 기록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다.
기록은 역모, 노비 반란, 당쟁 등 다양한 사건을 다뤘다.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넘어온 중죄인은 임시로 선정된 위관의 추국(推鞫·신문)을 받은 뒤 임금의 재가를 통해 최후 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문을 묶은 까닭에 재판 받는 이의 처지에서 기술한 변론은 찾아볼 수 없다.
당쟁의 주도권 변화에 따라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으로 뒤집히던 때임을 감안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고변에 의해 붙잡힌 이는 피의자가 아닌 ‘죄인’으로 취급됐다. 판결 근거는 대개 죄인의 자백에 의지했다. 고문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고문을 끝내는 방법은 자백과 죽음뿐이었다. ‘민중의 저항과 반란’이라는 제목의 서문은 책 내용과 상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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