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면서 오페라의 거장 주세페 베르디(1813∼1901)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자취를 구석구석 누비고 있습니다. 베르디는 당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악보 출판사이자 오페라 기획사였던 ‘카사 리코르디’와 계약을 맺고 있었고, 나이가 들어가는 베르디가 신작 발표 수를 줄여가자 애가 탄 카사 리코르디는 그의 뒤를 잇는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는 데 발 벗고 나섰습니다. 1883년 우수한 성적으로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푸치니는 딱 맞는 후보로 보였습니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도 카사 리코르디는 눈 딱 감고 푸치니를 후원했으며, 10년 뒤엔 결국 푸치니의 세 번째 오페라 ‘마농 레스코’가 히트를 거뒀고 이후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란 초대형 연타가 터졌습니다.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의 안목과 인내가 결실을 거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르디의 뒤를 이을 이탈리아 오페라 대표 거장 후보로 푸치니가 일찌감치 ‘단독 추대’ 된 것은 아닙니다. 카사 리코르디의 라이벌인 손초뇨사가 밀었던 마스카니가 있었고, ‘팔리아치’로 성공을 거둔 레온카발로가 있었으며, ‘안드레아 셰니에’의 조르다노, ‘아를의 여인’과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로 성공을 거둔 프란체스코 칠레아(1866∼1950) 등 라이벌이 줄줄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조르다노에겐 ‘격정파’, 칠레아에겐 ‘서정파’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조르다노 오페라의 주인공들은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셰니에처럼 격정으로 가득 찬 인물이 대부분이며, 칠레아의 오페라엔 ‘아를의 여인’ 남자 주인공 페데리코처럼 마음 약한, 시쳇말로 ‘유리 멘털’ 주인공이 많기 때문입니다. 페데리코는 마을 사람들이 약혼자를 놓고 떠벌리는 험담에 가슴앓이를 하다 결국 자살합니다.
23일은 칠레아의 탄생 150주년 기념일입니다. 마음 약했던 그의 오페라 주인공들처럼 칠레아도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며 웬만한 일은 양보하는 심성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배짱만 넘치는 사람보다는 마음 약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살기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그가 작곡한 ‘아를의 여인’ 중 아리아 ‘페데리코의 탄식’ 음반을 집어 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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