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넝쿨에 레이백 스핀을 건 한 송이 꽃, 굽 높은 구두 받쳐 신은 잘록한 허리에 외주름치마 둘러 입었다 긴 목덜미에는 활짝 핀 참외 꽃잎 여덟 장 향긋한 속내 드러내는데 호접몽 꾸는 밤이면 너는 나비처럼 날아 들거라 꽃 왕조의 궁전이니 온갖 꽃모가지 꺾어 네 무릎에 놓아 주마 누대의 하늘과 입 맞춰 온 내 본성은 죽음의 무도회를 지난 꽃, 활활 타는 불길로 중심을 비운 가장 아리따운 꽃병이지 않느냐 덥썩, 안지 말고 사쁜 접接하거라, 빙렬氷裂없는 사랑도 부서지면 시퍼런 칼날 겨누는 조각달 될 뿐이니 그리운 고려 하늘 흠집 나지 않겠느냐
꽃이기로서니 이보다 더 어여쁠 수 있으랴. 사내로 태어나서 누군들 꽃향기를 좇는 벌 나비가 아니랴만 아주 남달리 꽃 사랑에 빠진 나라님이 계셨어라. 여기 ‘청자참외모양병’(국보 94호)이 이르노니 고려 17대 임금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 묻혀 있던 꽃병이 그것을 밝혀준다.
송나라 태평노인(太平老人)의 ‘수중금’에서 “고려비색천하제일(高麗翡色天下第一)”이라 받들었던 비색 가운데서도 으뜸인 이 신품은 참외 꼴 몸뚱이에 활짝 핀 참외 꽃이 목을 길게 빼고 입을 벌리고 있다. 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7, 8호 가마터에서 꼭 같은 청자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거기서 나라님 머리맡에 놓을 꽃병을 구우라는 명을 받고 나이 든 도공은 치성을 드리고 하늘 아래 가장 고운 빛깔이며 여자보다 아리따운 몸매를 빚어 올렸으리라.
오호라! 어디 금은보화가 이보다 더 귀할쏘냐. 꽃 아닌 꽃병을 못내 아끼다가 무덤까지 가져갔으리라. 황통(皇統) 6년(1146년)의 연호가 적힌 인종의 시책(諡冊)과 함께 나온 것이니 바로 고려청자 도예의 절정기에 솟아오른 최상급 순청자이다.
시인은 ‘빙렬 없는 사랑도 부서지면/시퍼런 칼날 겨누는 조각달 될 뿐이니/그리운 고려 하늘 흠집 나지 않겠느냐’고 했으니 두 눈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이 꽃의 꽃, 사랑의 사랑 큰 그릇에 누구나 한 번쯤은 풍덩 빠져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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