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테리사 메이 영국 신임 총리의 호피 구두 패션이 화제다. 메이 총리는 올해 한국 나이로 61세. 그러나 프랑스 파리의 공원 벤치에 앉아있으면 메이 패션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든 살은 거뜬히 넘긴 듯한 할머니들이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거나 빨간 구두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 브누아트 그룰트는 올해로 96세였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3·1운동 다음 해(1920년)에 태어나 페미니스트 운동에 뛰어든 셈이다.
평생 페미니스트와 관련된 소설을 20권 쓴 그룰트의 젊음과 열정은 대단하다. 전 세계 27개국에서 수백만 권이 팔린 ‘이토록 지독한 떨림’(1988년)은 65세에 썼다. 혼외정사와 대담한 성적 표현으로 포르노그래피 논란이 일자 그녀는 당당히 “해방된 현대 여성의 표현”이라고 맞받았다. 여주인공 조르주는 30년 동안 가정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른바 쿨한 불륜 책이다.
아흔 살이 넘은 그녀는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룰트는 “억압자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 아이의 아버지고 가정에 돈을 대는 물주인 상황에서 결혼 이후 평등을 위해 싸우기에 불리한 위치가 된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는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어 저널리스트, 작가 남편과 결혼을 했고 아이도 세 명이나 낳았다.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자유는 자연스럽게 오는 게 아니다. 매일 공부를 해야 하고 때로는 매우 고통스럽다”고 말한 것도 이런 딜레마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93세의 나이에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택한 게 바로 세계 최초의 여성 페미니스트로 평가받는 올랭프 드 구주의 삶을 다룬 소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다.
구주는 프랑스 혁명 기간인 1791년 남성들의 권위에 도전해 여성 권리 헌장을 선포했다가 2년 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민운동가다. 남성들이 여성을 ‘뜨개질이나 하는 소유물’로 여길 당시 구주의 요구는 파격적이다.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이혼과 동거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성적 자유를 주장했다. 가부장권을 공격하면서 미혼모와 사생아의 권리도 옹호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당시 여성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주요 봉기 때마다 거리를 점령하는 데 앞장섰다.
캐나다 최대 프랑스어 신문 ‘라 프레스’의 저널리스트 나탈리 콜라르는 “그룰트가 대단한 열정으로 구주를 되살려내 우리를 때로는 웃게, 때로는 소리치게 만들었다”며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읽혀야 할 책”이라고 극찬했다.
그런 그가 지난달 21일 세상을 떠났다. 한창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로 떠들썩한 때인데도 프랑스 르피가로 르몽드는 물론이고 뉴욕타임스까지 “페미니즘의 대모가 떠났다”며 추모했다. 그녀는 글만 쓴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 월간지를 창간하고, 남성형으로만 존재하는 명칭의 여성형을 만드는 용어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여성 인권을 위해 평생 일했다.
그녀는 “항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내릴 때”라고 말했다. 그 배에서 내릴 때까지 그룰트는 치열하게 싸웠다. 21세기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쓴 18세기 원조 페미니스트 이야기, 두 여성의 치열함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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