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사업 실패를 계기로 문화재 행정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물막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청와대와 정치권의 개입이 최근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정치의 시녀’가 된 문화재 행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문화재 행정의 실상과 대책을 짚어봤다.
○ 영혼 없는 문화재청, 청와대 눈치만 살펴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한국전통문화대 총장을 수개월째 임명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한선교 새누리당 의원) “위에서 허가해야 한다.”(나선화 문화재청장) “위가 어디냐.”(한 의원) “청와대다.”(나 청장)
2014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나 청장은 문화재청의 산하기관장 인사까지 청와대가 일일이 관여하고 있음을 얼떨결에 실토했다. 청장이 임명하는 문화재위원도 청와대에 미리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이 청와대와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다 보니 문화재 행정의 전문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임시 물막이 검증 실험이 황금 같은 시간과 국비만 낭비한 채 실패한 데에는 문화재청의 무소신 행정이 큰 원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2013년 임시 물막이 사업 초기부터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청와대와 국무조정실에서 내려온 사안”이라는 이유로 전문가들의 지적을 묵살했다.
이미 지난해 12월 1차 임시 물막이 모형 검증 실험이 실패로 끝난 지 7개월이 흘렀지만 문화재청이 향후 계획조차 밝히지 않고 있는 것도 결국 여론을 살피는 눈치 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21일 물막이 사업 중단 결정을 발표한 이후 수많은 비판 보도가 쏟아졌지만 묵묵부답이다. “수위조절안, 생태제방안 등을 포함한 여러 대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문화재청의 무소신 행정은 반구대 암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의욕적으로 추진하다 자진 철회한 ‘궁스테이’ 정책이 대표적이다. 먼지만 쌓여가는 고궁을 제대로 활용하자는 취지로 비지정 문화재인 창덕궁 낙선재에 한정해 숙박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야당으로부터 ‘고가(高價) 숙박비’ 공세를 받고서 슬며시 정책을 포기했다.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 외풍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일반 행정직 위주의 조직 구성을 바꾸고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현장에 정통한 뚜렷한 논리를 갖추고 있어야 외부 압력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대한민국학술원 회원)는 “농촌진흥청처럼 학예직과 기술직의 비중을 높여 문화재 분야의 정책 전문성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 ‘표 얻기’ 수단으로 전락한 문화재 발굴
전문가들은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문화재 정책 왜곡도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속도전으로 치달아 몸살을 앓고 있는 경주 월성 발굴현장이다. 월성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출토된 신라 천년왕경 경주의 핵심 사적지다. 워낙 중요한 곳이다 보니 1970년대에 정부가 발굴을 추진하다가 “현 발굴 수준으로는 무리”라는 학계 의견을 받아들여 중단했을 정도다. 고고학계는 5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헤이조쿄(平城京)처럼 월성 발굴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주시장과 지역 국회의원들은 발굴 속도를 높일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주민들에게 가시적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호재인 데다 발굴 인력이 늘면 고용창출 효과를 홍보할 수 있어서다. 정수성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나 청장을 수시로 찾아가 “발굴 기관 10곳을 한꺼번에 투입해 월성 발굴을 빨리 끝내라”고 요청했다.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국회의원의 민원을 안 들어주면 국정감사 때 질문 강도가 독해지기 마련”이라며 “청장 입장에서는 의원들의 전화가 압력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더불어 문화재 정책을 관할하는 문화재위원회의 독립성이 최근 약화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명권을 쥔 문화재청장의 눈치를 살피는 일부 문화재위원이 있다는 얘기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위상을 지닌 문화재위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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