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계(竹溪) 사람이 개를 길렀다. 새끼 한 마리를 낳자 이웃에게 주어 기르게 했는데, 후에 새끼 두 마리를 낳자 자기가 길렀다. 새끼들이 다 자랐을 무렵 주인이 어미 개를 잡으려고 시냇가로 갔다. 새끼 두 마리는 급히 달려가더니 먼저 태어난 새끼 개를 데리고 시냇가로 왔다. 새끼 세 마리는 빙 둘러서서 어미 한 번 바라보고 주인 한 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울었는데, 그 소리가 몹시 슬프고 눈가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주인이 개를 잡아서 가지고 돌아와 솥에 삶을 때, 새끼 세 마리도 솥 가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다 익어서 막 먹으려 할 때 마침 이웃집 사람이 오더니, 솥을 들여다보고 침을 흘리며 “거참 맛있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세 마리가 큰 소리로 짖고 이빨을 드러내더니 펄쩍 뛰어 달려들어 그 사람을 마구 물어뜯었다.
‘이상하다. 나는 아까 시냇가에서 개를 잡기까지 했는데….’ 주인은 몹시 두려워서 개를 먹지 않고 가죽과 함께 땅에 던졌다. 그랬더니 세 마리가 달려들어 그것을 물고는 어미 개를 잡았던 곳으로 갔다. 어미개의 털이며 발톱 등을 남김없이 수습하여 산기슭에 묻더니 큰 소리로 울부짖고는 스스로 그 곁에 나란히 누워 죽었다.
김낙행(金樂行·1708∼1766) 선생의 ‘구사당집(九思堂集)’에 실린 ‘효구설(孝狗說)’입니다. 어미의 죽음을 슬퍼하고, 시신을 거두어 묻고, 어미를 따라 죽었으니 효자는 효자입니다. 그렇지만 맛있겠다며 입맛을 다셨을 뿐인 이웃집 사람은 사정없이 덤벼들어 물어뜯고, 정작 어미를 죽인 주인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개들의 행동이 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아래와 같이 정리해 주셨는데, 선생이 짐작한 새끼들의 심정이 또한 가슴을 울립니다.
사람에게 길러졌으니 주인에게 죽는 것은 가축의 도리가 그러한 것이다(養乎人而死乎主, 畜之道, 然也). 그러니 주인에게 도살당하고 주인에게 삶기는 것을 어찌 원망하여 복수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웃 사람의 “맛있겠다”라는 말 한마디에 새끼들이 그를 원수로 여겼으니, 저 개들이 어미 개가 도살되는 것을 어찌 한스러워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사람에게 길러졌으니 주인에게 죽는 것이 가축의 도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웃 사람이 어미 개를 도살하여 삶았다면 저 새끼 개들이 어찌 그를 물어 죽이는 것에서 그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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