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10년(1479년) 12월, 창덕궁 선정전의 어전회의다. 도승지 김승경(1430∼1493)이 말한다. “만약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된다면 반드시 3, 4월 무렵일 것입니다. 그들은 여름을 지나고 돌아갈 것입니다.” 성종이 대답한다. “어찌 그 정도이겠는가? 지난번에도 오이(瓜) 심었다가 익기를 기다려 돌아간 일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
명나라 사신들의 폐해는 심각했다. 뇌물로 대량의 은(銀)을 요구하고 뇌물을 받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 뇌물을 받지 않으면 ‘오이를 심어서 그 오이가 익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오이는 ‘과(瓜)’다. 벼슬아치의 임기를 ‘과=오이’로 표기했다. 공직자의 임기는 ‘과기(瓜期)’ ‘과한(瓜限)’ ‘과만(瓜滿)’이다. ‘오이=벼슬아치의 임기’는 중국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시대 제나라 양공이 오이가 익을 무렵 변방(葵丘·규구)으로 병사를 보내면서 “이듬해 오이가 익을 때 후임자를 보내 교체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사달이 났다. 이때부터 ‘오이=관리들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오이는 한반도, 중국의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시경에는 “밭두둑에 오이가 열렸다. 오이지 담기 좋다”는 내용이 있다. 한나라 때 기록에도 “고아가 수레에 오이를 싣고 가는데 수레가 엎어졌다. 도와주는 자는 적고 오이를 먹는 자는 많다”고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 말기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은 ‘신라시대의 오이’를 말한다. 최응(898∼932)의 ‘정원의 오이(園瓜生)’ 이야기다. 최응이 태어날 때 누런 오이 넝쿨에 참외가 열리는 이변이 있었다. 그는 왕건의 신임을 얻어 고려 초기의 높은 관리가 되었다(임하필기).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청자를 묘사하며 “술그릇의 형상이 마치 오이 같다”고 했다.
오이는 여러 식재료의 바탕이다. 참외는 ‘진과(眞瓜)’ 혹은 ‘감과(甘瓜)’다. 참 오이, 맛이 단 오이라는 뜻이다. 수박은 ‘서쪽(서역)에서 온 오이(西瓜)’고 박은 ‘포과(匏瓜)’다. 성호 이익(1681∼1763)이 말하는 호과(胡瓜)는 혼란스럽다. “빛은 푸르고 생긴 모양은 둥글며 익으면 누렇게 된다. 큰 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고 맛은 약간 달콤하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고 했다.
칡넝쿨과 더불어 ‘오이 넝쿨’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되었다. ‘과갈(瓜葛)’은 칡과 오이다. 가지와 잎이 마치 넝쿨같이 서로 엉클어진 친인척 관계를 뜻한다. ‘과질(瓜V)’은 오이 넝쿨이 끝없이 뻗어나가, 자손이 널리 번성함을 뜻한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등이 왕건을 찾아 ‘개국 혁명’을 이야기하는 자리. 왕건은 부인 유 씨에게 내용을 숨기려, “동산에 애오이가 열렸을 테니 따오라”고 시킨다. 유 씨는 문을 나가는 척, 되돌아와 머뭇거리는 왕건의 등을 떠민다(고려사절요). 조조의 아들 조식은 “군자는 모든 일을 미연에 방지하여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지 않으니,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머리의 관을 만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군자행).
오이는 청렴한 삶의 상징이기도 했다. 진나라 소평은 ‘동릉후’의 벼슬을 지냈다. 진나라가 망하자 소평은 장안성 동쪽에 오이를 심고 청렴하게 살았다. 그가 심은 오이가 아름다워서 당시 사람들이 동릉후의 오이, 즉 ‘동릉과’라고 불렀다(사기 소상국세가). 조선시대 문헌에는 동릉과가 자주 등장한다. ‘정과정곡(鄭瓜亭曲)’도 ‘동릉과’에 비길 만하다. 고려 인종 때 내시낭중 정서(생몰년 미상)는 모함을 받아 동래로 귀양을 떠난다. 그는 오이를 기르는 정자(瓜亭·과정)를 짓고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이때 남긴 노래가 바로 슬픈 곡조의 ‘정과정곡’이다. 과정은 정서의 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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