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으로 신학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한스를 위해 신학교 교장이 충고했던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나에게 수레바퀴란 어떤 것일까.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예술가의 삶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헤르만 헤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 ‘수레바퀴 아래서’는 20대 후반에 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신학교에서 7개월 만에 뛰쳐나와 변변치 못한 삶을 이어가던 헤세는 주인공 하일너와 한스에 자신을 투영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슈바벤 지역 북서쪽의 낡고 아담한 수도원. 차석으로 입학한 한스는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에서 벗어나 조금씩 신학교에 적응해갔지만 같은 방을 쓰던 힌딩거의 죽음을 비롯해 가장 친했던 하일너와의 감정싸움과 그의 퇴학 처분은 한스가 이고 가던 수레바퀴에 무게를 더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러시아에 처음 도착했던 날, 나의 운명도 수레바퀴 아래로 내던져졌다. 20여 년 동안 발레리나로 살아오면서 나 역시 수도 없이 하일너를 만나고 힌딩거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 같다. 지인이 불나방과 같다고 표현했던 발레리나의 삶을 걸어가면서 물에 빠져 쓸쓸히 생을 마감했던 한스가 생각나 정처 없는 슬럼프에 허덕였던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뿐만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도 한스는 다가와 수레바퀴 아래의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평생을 살아간 헤세는 어떤 통찰을 갖고 예술에 대해 정의했을까. “나는 곧잘 예술은 모두 대가(代價)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실패한 인생의, 발산하지 못한 수성의, 순조롭지 못한 연애의, 몹시 힘들고 실제 가치의 열 배나 높은 보상을 치른 대가라고 말이다.”
그렇다. 예술가의 삶은 고단하다. 끊임없는 내면의 전쟁, 표현의 고통은 발레리나의 수레바퀴다. 하지만 치열한 과정을 견뎌낼수록 정신세계는 빛나고 비로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고달파도 이 아이러니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무대에 오른다. 덕분에 수레바퀴가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더 젊었을 때,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가 아닌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 조금 억울하지만 뭐 어떤가. 헤세 역시 칠순 가까이 되어서야 노벨문학상을 받았는걸. 이제는 조금 덜 무거운 수레바퀴를 짊어지게 되었으니 더 멀리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기나긴 여정을 위해 오늘도 작은 발끝에 의존해 견뎌야 하는 연약한 예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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