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여행 전문기자의 ‘아름다운 동행’]神들의 봉우리 속으로… 1280km ‘알프스 테마극장’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6일 03시 00분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정호승 시인의 ‘고래를 위하여’)

생모리츠를 떠나 체르마트로 향해 운행하는 빙하특급열차가 잠시 정차한 이곳은 스위스 알프스 중앙부의 해발 2044m 오베랄프 고갯마루. 6월 중순인데도 호수는 반쯤 얼음에 덮여 있다.
생모리츠를 떠나 체르마트로 향해 운행하는 빙하특급열차가 잠시 정차한 이곳은 스위스 알프스 중앙부의 해발 2044m 오베랄프 고갯마루. 6월 중순인데도 호수는 반쯤 얼음에 덮여 있다.
지난달 스위스의 열차 칸에서다. 우연히 찾아 가져온 MP3에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흘러나왔다. 순간, 잊혀졌던 기억의 편린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이 시다. 동시에 학창시절 친구들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염천 복중의 한낮처럼 뜨거운 맨가슴으로 이 세상을 다 품을 듯 양팔에 힘주며 서로를 껴안고 이 노래를 함께 불렀던….

그때 기차는 제네바 호수를 끼고 호반도시 몽트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멋진 풍광을, 이 아름다운 추억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는. 이 쾌적한 기차 칸에서 빛의 속도로 달려오느라 그 의미를 곱씹지 못한 채 흘려보낸 지난 인생을 친구들과 함께 반추해 보고 싶다는….

그게 스위스, 그것도 기차여야 할 이유가 있다.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뭔가를 보거나 해야 할 의무감을 갖게 하는 통상의 여행지가 아니어서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감동으로 승화되므로. 일상의 상념이 사라진 자리에는 먼 옛날의 추억과 기억의 심상이 채우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스위스 기차는 세계 모든 기차 중에서도 최고니까. 편리함과 쾌적함에 안전까지.

오늘 ‘아름다운 동행’은 옛 동무와 함께 스위스 곳곳을 기차로 돌아보는 추억여행. 저렴한 ‘스위스 트래블 패스’(이하 ‘스위스패스’)로 떠나는 ‘스위스 그랜드 트레인 투어(Swiss Grand Train Tour)’다. 스위스패스로는 스위스 전역의 모든 공공교통수단(철도 버스 전차 보트)을 일정 기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사설 산악철도와 로프웨이, 케이블카, 특급테마열차는 50% 할인.

올해 6월 독일·이탈리아의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이 스위스에서 만났다.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 개통식에서다. 이 터널은 알프스의 고트하르트 산맥에 가로막힌 밀라노(이탈리아)와 루체른(스위스)을 잇는 세계 최장(57km)의 터널인데 세 지도자가 참석했다는 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 이 터널은 유럽의 남과 북을 잇는 대동맥이다.

스위스철도가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데는 이런 지리적 환경이 작용했다. 유럽의 십자로가 되다 보니 험한 알프스를 철도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4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도 긍정적으로 기능했다. 독일인의 기계설계능력, 프랑스인의 정밀기술과 예술적 기질, 이탈리아인의 융합정신과 창의력, 그리고 스위스 고유의 개척정신과 근면함, 조직력(길드 정신)이다. 스위스정신은 이런 네 나라 언어와 민족의 융합과 통섭의 결정체다. 이 터널만 해도 두 번째다. 오리지널은 이미 1882년에 개통했다. 이번 것은 고속용 직선터널이다.

라인 강에 의해 침식당해 협곡을 이룬 스위스의 라인밸리. 빙하특급열차가 지나고 있다. 스위스 트래블시스템 제공
라인 강에 의해 침식당해 협곡을 이룬 스위스의 라인밸리. 빙하특급열차가 지나고 있다. 스위스 트래블시스템 제공
그런데 스위스는 철도만 발달한 게 아니다. 도로, 뱃길도 좋다. 산봉우리만큼이나 많은 호수와 인구의 10%나 되는 산중의 낙농가 때문이다. 이런 스위스를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교통망의 총연장은 2만6000km. 이 중 철도(SBB)는 5100km다. 연간 철도이용객은 누계 3억 명. 인구 780만 명 국가에서 이렇듯 이용객이 많은 이유는 국민은 물론 관광객이 워낙 많기 때문. 스위스에서 철도는 한국의 지하철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마을버스의 원조도 사실은 스위스의 PTT 버스다. PTT는 ‘우편·전화·전보(Post·Telephone·Telegraph)’의 약어. 철도로 운반된 우편물을 인근 산간마을로 배달하는 우편행낭 운송 수단인데 그걸 마을버스로 겸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모든 공공교통수단을 커버하는 스위스패스 한 장이면 스위스 여행은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알프스 산간의 스위스를 기차로 두루 둘러보자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위스철도가 개발한 게 있다. 지역마다 가장 멋진 노선으로 운행하는 다양한 특급테마열차다. 가장 유명한 것은 겨울올림픽 발상지 생모리츠가 있는 엥가딘 계곡과 마터호른 봉 아래 산중마을 체르마트를 오가는 ‘글래시어 익스프레스(Glacier Express·빙하특급)’. 해발 2044m의 고개(오베랄패스)를 넘어 산중마을 안데르마트 등을 경유해 온종일 운행(8시간 3분)한다.

오늘은 이런 특급테마열차를 타고 스위스의 동서남북을 여행하는 ‘스위스 그랜드 트레인 투어’를 소개한다. 최소 9일이 필요한 이 열차 대장정은 옛 동무와 함께 도전해 볼 만하다.

스위스 그랜드 트레인 투어

스위스의 대표적인 산과 도시, 강과 호수, 빙하와 유적을 두루 살필 수 있도록 스위스 트래블시스템(관광공사)이 제안하는 철도여행 루트다. 총연장은 1280km이며 구간은 모두 7개. 출발은 어디라도 상관없고 일반 열차를 이용해도 가능하다. 바람직하기론 스위스패스 15일권으로 여유 있게 쉬어가며 두루두루 들르는 게 최고다. 필요한 건 스위스패스와 특급열차의 좌석 예약과 추가 비용 지불, 숙박 예정지의 객실 예약. 다음은 구체적인 루트(지도 참조)다.

[1] 취리히→생갈렌(133km·2시간 50분)

취리히 공항엔 철도역도 함께 있어 출발지로 안성맞춤이다. 첫 목적지는 콘스탄스 호반의 생갈렌. 도중 샤프하우젠에선 유럽에서 가장 큰 낙차의 라인 폭포를 본다.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생갈렌 구도심에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바로크 양식의 베네딕트 수도원 부속 도서관(손으로 쓴 책 14만 권 소장)이 볼거리.

[2] 생갈렌→루체른(125km·2시간 15분)

특급테마열차 ‘보랄펜 익스프레스(Voralpen Express)’의 운행 구간이다. 루체른은 필라투스와 리기 산이 병풍처럼 두른 호수이자 호반의 도시. 지붕을 씌운 다리 ‘카펠’교(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가 랜드마크. 스위스 상징인 ‘빈사의 사자상’도 여기 있다. 목숨을 팔아 가족과 나라를 지켜온 스위스 용병의 처절한 역사를 볼 수 있다.

[3] 루체른→몽트뢰(191km·5시간 8분)

인터라켄을 경유하는 루트로 특급테마열차 ‘골든패스라인(Golden Pass Line)’ 운행 구간. 로트호른 봉 아래 브뤼니크 고개를 넘어 툰과 브리엔츠 두 호수 사이 인터라켄을 경유해 짐멘 계곡의 츠바이지멘을 지나 제네바 호반을 끼고 몽트뢰로 향한다. 도중 인터라켄에 내려 융프라우 철도로 갈아타면 유럽에서 가장 높은 3454m 높이의 철도역 ‘톱 오브 유럽’에 오를 수 있다. 산중턱(그린델발트·벵겐)까진 스위스패스가 통용된다.

몽트뢰는 ‘스위스 리비에라’(프랑스 지중해변 휴양지 리비에라에서 따온 말)의 중심 타운으로 제네바(레만) 호반의 프랑스풍 도시. 찰리 채플린 박물관인 ‘채플린스 월드’가 있는 브베도 기차로 10분 거리다.

[4] 몽트뢰→체르마트(148km·2시간 31분)

와인 산지 발레 지방의 시용(Chillon) 성을 지나 이탈리아 국경의 마터호른 봉(4478m) 아래 계곡마을 체르마트로 가는 루트. 체르마트에선 로프웨이로 클라인마터호른(3883m)에 올라 ‘마터호른 빙하궁전(Glacier Paradise)’을 둘러보거나 산악열차(10km·33분)로 마터호른 전망대 격인 고르너그라트(3089m)에 오른다. 체르마트에선 전기차와 마차만 운행한다.

[5] 체르마트→생모리츠(291km·8시간 3분)

알프스의 풍광을 즐기도록 통유리 창을 지붕 일부까지 확장시킨 럭셔리 파노라마 객차 글래시어 익스프레스의 운행 구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특급열차(The world‘s slowest express train)’라는 별명도 붙었다. 천천히 운행하는 덕분에 91개의 터널과 291개의 다리를 지나고 고도 2033m의 오베랄프 고개를 넘는 동안 펼쳐지는 풍경을 편안히 감상할 수 있다. 점심식사를 미리 주문하면 오베랄프를 넘는 동안 식도락과 산악 풍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생모리츠는 유럽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스키마을로 호수가 계단처럼 포진한 엥가딘 계곡의 호반에 자리 잡고 있다.

[6] 생모리츠→루가노(183km·6시간 42분)

이 루트는 티라노를 경유하는데 생모리츠∼티라노(베르니나 선)는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열차로, 티라노∼루가노는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버스로 이동한다. 베르니나 선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레티셰 철도(122km)의 일부. 다리 196개와 터널 42개를 통해 지형의 험난함이 가늠된다. 티라노와 루가노는 이탈리아어권 도시로 이탈리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7] 루가노→루체른(182km·5시간 21분)

고트하르트 산맥을 종단해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루트로 ‘윌리엄 텔(William Tel)’ 익스프레스의 운행 구간이다. 루가노를 떠난 기차는 오베랄프 고개 밑의 산중마을 안데르마트를 거쳐 1882년 개통한 고트하르트 터널로 산맥을 관통한다. 루체른은 아들 머리 위에 얹은 사과를 석궁으로 쏘아 맞힌 윌리엄 텔 설화의 탄생지. 도중 플뤼엘렌∼루체른 구간(루체른 호수)은 페리로 이동한다. 취리히 공항은 루체른에서 57km(46분) 거리.

안데르마트(스위스)에서 조성하 여행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스위스 트래블 패스: 외국인 전용, 3·4·8·15일 4종(1등·2등석 구분)이 있다. 15일권은 1등칸 704스위스프랑, 2등칸 440스위스프랑. 박물관(490곳) 무료 입장, 산악열차 50% 할인. 6세 미만 어린이는 승차 무료, 부모 중 한 사람 이상이 동반하는 6∼16세 자녀도 한 명은 무료. 26세 미만은 스위스 트래블 유스패스(15% 할인가) 구매. 4∼8일 일정 등 상세한 정보는 www.swisstravelsystem.com(한글) 참조. 국내 여행사에서 판매 중. 1스위스프랑은 약 1145원.

스위스 철도여행: 스위스철도 애플리케이션(SBB)만 있으면 스마트폰으로 내가 타거나 갈아탈 열차의 정확한 출발 및 도착 시간, 플랫폼 번호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보 제공은 영어로만.

스위스정부관광청: www.myswitzerland.com/ko(한글). 그랜드 트레인 ‘가상투어’를 클릭하면 보다 세밀하게 여행 루트를 확인할 수 있다.
#스위스#스위스 알프스#스위스 철도여행#스위스 트래블 패스#루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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