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거장들이 쓴 흑백영화 같은 범죄 단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6일 03시 00분


◇헤밍웨이 죽이기:엘러리 퀸 앤솔러지/버트런드 러셀 등 지음/엘러리 퀸 엮음·정연주 옮김/408쪽·1만4500원·책읽는섬

범죄 소설은 즉각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인간의 다층적 측면을 조명한다. 몽환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로 추리소설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동아일보DB
범죄 소설은 즉각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인간의 다층적 측면을 조명한다. 몽환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로 추리소설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동아일보DB
버트런드 러셀, 윌리엄 포크너, 아서 밀러….

쟁쟁한 작가 12명을 모아 놓은 것만으로도 일단 눈길을 끈다. 노벨 문학상 혹은 퓰리처상 수상자들이다. 20세기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인 엘러리 퀸(사촌 간인 프레더릭 더네이, 맨프레드 리의 공동 필명)은 이들이 쓴 범죄·미스터리 단편 21개를 엮어 ‘미스터리 걸작(Masterpieces of Mystery)’을 펴냈다. 이 가운데 12편을 출판사가 추려냈다.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을 보고 손가는 대로 펼쳤다. 개성 강한 글쟁이들의 면면만큼이나 작품의 결도 제각각이다. ‘설탕 한 스푼’(윌리엄 포크너)은 조엘 플린트라는 사내가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플린트는 감옥으로 가지만 곧 연기처럼 사라진다. 괴팍한 프리첼 영감은 딸이 죽고 사위가 사라진 후 집에 칩거한 채 챙겨주러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성질만 낼 뿐이다. 눈치 빠른 이라면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채기 어렵지 않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장치가 신선하다.

미국 최초의 여성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수전 글래스펠이 쓴 ‘여성 배심원단’은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포착했다. 같은 침대에서 자던 남편이 밧줄에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되자 아내인 라이트 부인은 용의자로 지목돼 수감된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는 단서는 물론 이유도 알 길이 없다. 검사와 마을 남성들이 2층 침실 수색에 집중하는 동안 여성들은 라이트 부인이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옷가지를 챙기려고 부엌 주변을 돌아보다 과일조림병, 허름한 검정 치마, 텅 빈 새장을 발견한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물건에서 여성들은, 처녀 시절 예쁜 옷을 입고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라이트 부인이 남편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차츰 알게 된다. 그리고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버드나무 길’(싱클레어 루이스)에는 1인 2역을 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원하는 바를 손에 쥐지만 허망함에 빠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시 되돌리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의 심리를 파헤친다. ‘사인 심문’(마크 코널리)과 ‘기밀 고객’(제임스 굴드 커즌스)은 마지막에 깜짝 반전을 선사한다.

‘헤밍웨이 죽이기’(매킨레이 캔터)는 제목 때문에 내용이 정말 궁금했다. 갱단 두목과 경찰의 추격전을 그렸는데, 두목 이름이 체스터 헤밍웨이다. 아, 낚인 기분이다. 1934년에 출간했다는데 그 시절에도 ‘낚시’란 게 있었던 걸까. 아니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일종의 비틀기였을까.

한층 빠르고, 더 복잡하고 치밀하게 전개되는 요즘 범죄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다소 예스러운 느낌을 줄 것 같다. 여유롭게 흘러가는 흑백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흑백 영화도 나름의 멋이 있는 법.

범죄·미스터리물을 전문적으로 쓰지 않았던 유명 작가들이 이런 작품에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다만, 몇몇 단편은 읽다 보면 세계적인 작가라 해도 모든 작품을 다 잘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헤밍웨이 죽이기#버트런드 러셀#윌리엄 포크너#아서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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