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만히 있으면/미쳐버릴 것 같다거나/죽고 싶다거나 죽여 버리고 싶어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하지 마./네 안의 태양이/네 속을 불태우고 있는 게 아니라면/하지 마.…”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마포구 희우정로의 작은 서점 ‘책방 만일’에 찰스 부코스키의 시 ‘그래 작가가 되고 싶으시다고?’가 울려 퍼졌다. 황유원 시인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영어 원문도 낭독했다. ‘if∼’로 시작해 ‘don‘t do it’이 반복되며 리듬이 느껴졌다. 대학생, 회사원, 주부 등 20, 30대 남녀 16명이 모여 시와 소설을 돌아가며 소리 내 읽고 있었다. 최근 낭독 모임이 확산되고 있다. 작품을 분석하거나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단지 낭독만 하는데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뭘까. 》
○ 누워 있는 글자를 소리를 통해 세우다
독립 출판 그룹 ‘읻다 프로젝트’에서 매달 셋째 주 목요일에 여는 낭송회는 이번이 16회째로, 이번 주제는 ‘반하고 읻다’였다. 이 그룹의 명칭은 고어로 ‘좋다’, ‘아름답다’는 뜻이면서 ‘잇다’ ‘존재한다(있다)’ 등의 의미도 담은 것이다. 16명이 동그랗게 둘러앉으면 꽉 차는 공간에서 차분하게 육성으로 읊는 시를 듣고 있자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김영승 시인의 ‘별’이 소개됐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시시킨의 ‘서간집’과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젖은’은 우리말은 물론 러시아어, 프랑스어로도 낭송됐다. 이후 각자 준비해 온 것을 읽기 시작했다.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널 사랑해.”(이장욱 ‘근하신년-코끼리군의 엽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당신을 조각내었다/함께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당신을 온전히 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10’)
그림책 ‘아무것도 아닌 것’(쇠렌 린)이나 ‘야간 비행’(생텍쥐페리)을 읽는 이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거나 낭독만 하고 끝내기도 했다. 기자는 일본에서 50년간 서점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를 인터뷰한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의 일부를 낭송했다.
회사원 차서현 씨는 “사람의 목소리, 호흡, 떨림을 느끼며 텍스트에 따라 그려 낸 이미지에 잠길 수 있어서 좋았다. 육성으로 러시아어를 듣기는 처음인데 참 아름다웠다”며 밝게 웃었다. 주부 안혜윤 씨는 “누워 있는 글자를, 소리를 통해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며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요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정제된 언어를 통해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는 내부에 꾹꾹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 내면 성찰과 스트레스 발산 효과
낭송회를 주관한 최성웅 씨는 “자기만의 눈으로 책을 보고 문장을 느끼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모임을 만들었다”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일주일 전에 공지해도 15∼20명이 모인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경란 씨는 낭송회 참석이 다섯 번째다. 그는 “회사에서 높은 톤으로 싸우듯 말하는 소리를 듣다가 정제된 언어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들으니 낯설면서도 편안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학 작품을 소리 내 읽는 것이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고 말한다.
김상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담긴 문학 작품을 곱씹으며 읽으면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시각과 청각, 발성할 때 몸의 떨림 등 여러 감각 기관을 활용할수록 만족감이 높아지고 기억도 오래 간다”고 말했다. 읽을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낭송할 때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이나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지식과 정서를 공유하면 치유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운율과 리듬을 통해 노래를 부르는 듯한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