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온도가 32도를 넘어섰지만 평화로운 7월 말 오후였다. 에어컨 옆에 앉아 뉴스를 클릭하기 전까지는. 우연히 본 환경부발 기사에서 ‘옥틸이소티아졸론(OIT)’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유해물질이 함유된 항균필터를 사용한 에어컨 명단을 발견했다. 3년이나 쓴 우리 집 에어컨 모델명이 거기 있었다.
환경부 보도자료로는 모델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어 제조사의 모바일 서비스센터에 접속했다. 인터페이스는 정장을 잘 차려입은 말쑥한 제조사 직원을 마주하는 것처럼 완벽했다. OIT가 유해물질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새 필터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두 번 클릭하지 않아도 제품명과 일련번호만 입력하면 환경부 발표 제품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친절하게 문자메시지까지 보냈다.
‘공기청정 필터 교환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문제의 필터는 내 손으로 제거했고 새 필터는 그로부터 열흘 뒤 택배로 도착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물 흐르듯 처리된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세련된 직원에게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기대했던 건 공짜 필터가 아니라 ‘많이 놀라셨죠.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였다.
캐나다 가수 데이브 캐럴이란 사람이 있다. 캐럴은 2008년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미국 시카고로 가는 유나이티드항공 여객기를 탔다가 수하물로 맡긴 자신의 기타가 화물칸에 마구 던져지는 것을 목격했다. 도착지에서 기타는 부러져 있었다. 미국 공항에서 직원에게 항의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9개월이 지나서야 e메일이 도착했다.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캐럴은 ‘유나이티드는 기타를 부순다네(United Breaks Guitars)’라는 제목의 재치 있는 노래와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업로드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이 동영상은 1500만 번 넘게 클릭됐고, 여전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공유되고 있다. 캐럴은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전문대학원(MBA)에서 기업의 리스크 관리 사례로 강의까지 했다. 그 사이 항공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쳤으며 이후 평판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카고 공항에서, 고객센터에서, 본사에서 단 한 명이라도 캐럴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라는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기업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올해 소비자들은 여러 기업이 만든 ‘고객관리 매뉴얼’의 민낯을 목격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진심으로 건네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확인했다. 자동차 연료소비효율과 엔진 성능을 자랑했던 기업은 ‘개별 응대는 안 된다’는 해외 본사 지침을 내세우다가 여론에 밀려 뒤늦은 사과를 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를 잃은 고객들과 사고 이후 5년이 지나서야 사과를 한 기업 간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공들여 구축한 그들의 브랜드 가치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각종 위기관리 매뉴얼과 즉각적인 대응, 창구의 일원화…. 에어컨 제조사와 항공사, 올해 논란을 빚은 모든 기업의 고객 담당자들은 사실 누구 못지않은 리스크 관리의 전문가들일 것이다. ‘고객 만족’이라는 현수막을 붙이고 사내 교육도 받을 것이고, 서비스센터 사이트를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하게 개선할 수 있는지 치열한 회의도 했을 것이다. 그 회의에서는 피해 고객이 회사로부터 가장 먼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지 제대로 논의됐을까. 완벽한 매뉴얼과 회의 자료 안에는 과연 ‘사람’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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